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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뉴욕에서 결성된 토킹 헤즈(Talking Heads)는 미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뉴웨이브 밴드 중 하나다. 프론트맨 데이비드 번(David Byrne)을 중심으로, 이들은 펑크의 에너지, 아트록의 실험성, 아프로비트와 민속 리듬까지 융합하며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Stop Making Sense'(1984)는 토킹 헤즈의 198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판티지스 극장에서 열린 네 차례의 공연을 담은 콘서트 실황 영화다. 연출은 영화 '양들의 침묵'으로 잘 알려진 조나단 드미(Robert Jonathan Demme), 촬영은 '블레이드 러너'의 조던 크로넨웨스(Jordan Scott Cronenweth)가 맡았다.


이 작품은 단순한 공연 기록을 넘어, 음악 다큐멘터리이자 무대 예술의 경지를 보여주는 퍼포먼스 아트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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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베이스와 드럼이 심장을 두드리며 공명한다. 음악, 무대, 조명, 움직임, 카메라의 시선이 유기적으로 엮여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린다. 말 그대로, ‘말이 되지 않는’ 감각의 파도다. 설명이 불가능하니까, 오히려 더 정확하게 느껴진다.

 

 


시작은 낮게, 그러나 뜨겁게


 

영화는 거대한 밴드도, 가득 찬 관객석을 비추는 오프닝도 없다. 무대 위로 단 한 명, 데이비드 번이 기타와 카세트 라디오를 들고 무대 위로 걸어 들어온다. 그는 곧 리듬에 맞춰 ‘Psycho Killer’를 부른다.

 

 

I can’t see, to face up to the facts (사실을 마주할 수가 없어)

I’m tense and nervous and I can’t relax. (긴장되고 불안해서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어)

 

- Psycho Killer

 

 

위험한 충동과 억눌린 감정이 담긴 노래의 도입부는 마치 리허설 같다. 느슨하고 조용하다. 하지만 데이비드 번의 눈빛과 손끝에 흐르는 긴장감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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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밴드 멤버들이 한 명씩 무대 위로 들어오며, 노래와 악기가 겹겹이 쌓여간다. 베이스, 드럼, 키보드, 백업 보컬까지, 각 요소는 마치 퍼즐 조각처럼 차례대로 등장하여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간다. 무대의 구성 방식은 곧 이 영화의 핵심이다. 연주가 쌓이면서 무대는 점점 생명을 얻는다. 소리가 조화롭게 어울리며 자아를 형성하는 듯하다.

 

영화는 공연을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대 그 자체를 감각적으로 번역해 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출이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MTV식 클로즈업과 과잉 편집은 없다. 대신 카메라는 고요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무대 위의 에너지 흐름을 따라간다. 줌과 트래킹, 롱숏과 바스트샷이 리듬에 맞춰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마치 무대 위 안무처럼 하나의 ‘보는 음악’을 완성해 낸다. 관객을 거의 비추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존재감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스테이지의 물리적 경계를 허물며, 영화관의 무대는 더 이상 현실을 닮은 영상이 아닌 현실 그 자체의 과장된 은유가 된다. 즉, 영화는 그 공연을 회고하기보다는, 내가 무대 위에 있는 것 같은 새로운 몰입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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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데이비드 번은 무대 위에서 불안하게 휘청이고, 양팔을 기묘하게 돌리며, 때로는 주술적인 몸짓으로 관객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이 기이한 동작은 그 자체로 너무나 진지하다. 무의식의 표정처럼 다가오는 몸짓에 감겨버린다.

 

데이비드 번의 퍼포먼스에는 일본의 전통 무용, 특히 가부키(歌舞伎)의 춤이나 노(能)의 극양식에서 차용한 정지와 반복, 리듬의 여백이 섞여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실제 동양 전통 무용의 양식을 연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덕분에 그의 퍼포먼스는 의식처럼 반복되면서도 무아지경의 몰입을 유도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의 퍼포먼스는 신체 언어로 말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아트 같다. 몸으로 불안을, 고통을, 반복되는 일상을 체현한다.

 

 

 

무대 위의 빅 슈트, 사회 속의 빅 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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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등장하는 거대한 슈트(Big Suit). ‘Girlfriend Is Better’의 시퀸스에서 데이비드 번은 이상한 복장을 입고 다시 등장한다. 어깨는 지나치게 크고, 몸통은 불균형하게 부풀어 있다. 덕분에 무대 위에서 데이비드 번의 기이한 움직임은 일종의 비현실적 존재처럼 보인다.

 

 

I’m just an animal looking for a home (나는 그저 집을 찾는 한 마리 동물이야)

And share the same space for a minute or two (잠깐이라도 함께할 공간을 찾고 있을 뿐이지)

 

- Girlfriend Is Better

 

 

그가 무대에서 이 슈트를 입고 움직일 때,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슈트에 의해서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큰 옷은 큰 생각을 담기 위한 것”이라는 번의 농담 섞인 말처럼, 빅 슈트는 곧 사회적 정체성의 껍질이자 억압의 은유로 읽힌다. 그는 자아를 연기하지 않고, 자아를 과장하여 해체한다. 휘청이는 몸은, 무대 속에서 비로소 해방을 경험한다.


2022년 WIRED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있을 수도 있고, 어딘가 창고에 보관 중일지도 몰라요. 혼자 투어를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죠.”


빅 슈트는 이제 독립적인 존재처럼 느껴진다. 패션계, 정치계, 대중문화 속으로 파고들며 ‘보는 옷’에서 ‘기억되는 상징’으로 변모했다.

 

 


불안의 박동, 해방의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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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킹 헤즈의 음악은 장르적 정체성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펑크, 뉴웨이브, 아프로비트, 가스펠에 심지어 실험 음악이 기묘하게 겹쳐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의 핵심은 리듬에 있다. 그것도 강박적이고 반복적이며, 마치 불안을 복사하는 듯한 리듬이다.

 

 

And you may tell yourself (그리고 너는 스스로에게 말할지도 몰라)

This is not my beautiful house! (이건 내가 살던 멋진 집이 아니잖아!)

And you may tell yourself (그리고 너는 스스로에게 말할지도 몰라)

This is not my beautiful wife! (이 사람은 내가 알던 멋진 아내가 아니야!)

 

- Once in a Lifetime

 

 

이 노래는 일상의 낯섦을 강박적으로 되뇐다. 가사도, 연출도, 조명도 그 반복을 따라간다. 조명은 튀고, 꺼지고, 점멸한다. 'Making Flippy Floppy'에서는 무대 뒤편 스크린에는 무의미한 단어가 나열되고, 'Swamp'에서 연주자들은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져 모습을 분간할 수 없어진다. 그 모든 사이 리듬이 광처럼 밀려들고, 무대는 파괴가 아닌 해방으로 치닫는다.


이 외에도 ‘Burning Down the House’의 폭발적인 에너지, ‘This Must Be the Place’의 섬세하고도 따뜻한 정서, ‘Life During Wartime’의 긴박한 디스토피아 리듬 등 모든 곡이 각기 다른 정서의 덩어리처럼 공연을 구성한다. 이 공연은 반복으로 관객을 몰아붙이다가, 결국 어느 순간 우리의 몸을 음악에 내맡기게 만든다. 그건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감각의 직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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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p Making Sense'라는 제목은 어쩌면 데이비드 번이 관객에게 보내는 반어적 농담일지도 모른다.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질 수 없지만, 몸이 먼저 반응한다. 생각보다 심장이 먼저 움직이며 감각과 직관을 통한다.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도 계속해서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을 춤추게 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하나의 무대가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어떻게 몸과 빛과 소리가 하나의 서사로 엮을 수 있는지를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관객은 1980년대 가장 대담했던 아티스트가 뿜어내는 열기와 노래를 가장 선명하게 다시 마주한다. 단순한 회고를 넘어 오늘날 관객들에게 무엇에 몰입하고 있는지, 어떠한 리듬을 타고 있는지 묻는다. 그래서 영화는 ‘보기’보다는 ‘휩쓸리는’ 체험에 가깝다. 극장은 더 이상 스크린이 아니라, 당신의 감각을 물리적으로 흔드는 ‘현장’이 된다. 모든 걸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전달받은 감각과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도, 불이 켜진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 리듬 속에 있었다. 그 박동은 내 몸 어딘가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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