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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오디션>은 심각하게 잔인하다는 이유로 ‘수입 불가’ 판정을 받고 한국에서 개봉되지 못했다. 불쾌함과 잔인함이 영화에 지속적으로 따라붙는 꼬리표로 자리매김하자, <오디션>은 공포에 면역이 있든, 취약하든 모든 관객들이 단단히 각오해야지만 겨우 재생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특히 불쾌함과 잔인함은 사라진 여인을 찾는 동안 발동되는 서스펜스와 후반 20분 내내 벌어지는 극악무도한 고문 장면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영화를 반복해서 본 입장에서 <오디션>은 소름 끼칠 만큼 섬뜩하고 고어적 요소가 다분하지만, 의외로 슬픔의 정서와 더 밀착해 있다는 인상이 들기도 했다. 슬픔의 정서가 두드러지지 않은 까닭은 서사를 따라가는 시선이 남자 주인공 아오야마(이시바시 료 분)에게 한정된 점 때문일 것이다. 상영시간 115분이 다 흐를 때까지 여자 주인공 아사미(시이나 에이히 분)의 마음은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아사미가 들어가 있는 공간에 초점을 맞춰 <오디션>을 살펴본다면, 조금 더 입체적인 감상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과연 ‘죽기 전에 봐야 할 최고의 공포영화’라는 포스터 문구처럼 <오디션>은 무시무시하기만 할까?
오디션장: 감정 없는 인형으로 존재하기
영화사를 운영하는 아오야마는 7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홀로 아들 시게히코(사와키 테츠 분)를 키우는 중년 남성이다. 그는 아들의 권유로 재혼을 염두에 두게 되고, 이런 고민을 친구 요시카와(쿠니무라 준 분)에게 털어놓는다. 아오야마가 영화 제작자라는 점을 이용해 요시카와는 로맨스 영화 오디션을 열어 결혼 상대를 구해보자고 제안한다.
주연 배우를 뽑는다는 명분으로 오디션을 개최해서 배우자를 고르는, 이 엽기적인 방법에서 영화 제작은 애당초 중요하지 않다. 영화야 어차피 엎으면 그만인 것. 자신들의 무책임함으로 인해 좌절할 여성 지원자를 고려할 생각은 처음부터 배제된 상태이다. 요시카와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들였던 아오야마지만, 그도 결국에는 친구의 제안에 그저 끌려가기로 한다. 자신의 이상형인 예술 분야에 전문적인 소양을 가진, 조신한 여성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설렘까지 느낀다.
오디션장에는 주연 배우가 되고자 용기를 낸 수십 명의 여성 지원자로 붐빈다. 오디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친구의 재혼을 바라는 요시카와는 무례한 질문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사랑 없이 잠자리해 본 적 있는지, 마약에 손을 대본 적 있는지, 유흥업소에서 일해 볼 생각이 있는지. 영화와는 전혀 관련 없는 질문을 하는 요시카와의 얼굴에서 양심은 찾아볼 수 없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오야마 역시 요시카와의 언행을 방관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결혼 상대로서 적절한지’에 대해서만 평가받는 여성 지원자들은 카메라와 면접관의 시선에 의해 분해된다. 가차 없는 품평회와 다름없는 이 오디션장에서 여성들 개개인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상품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미리 지원서에서 아사미를 인상 깊게 보고 그녀의 차례를 기다리던 아오야마는 아사미가 등장하자, 마치 소개팅하는 사람처럼 긴장한다. 차분한 분위기, 상처를 직시하는 태도, 발레를 했던 경험은 아오야마가 그토록 찾았던 이상형에 부합한다. 정작 아사미는 배우 오디션으로 알고 왔지만, 아오야마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위아래로 아사미를 훑는 아오야마의 눈길은 이미 그녀를 결혼상대로 확정지었음을 말해준다. 상대방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다. 아오야마에게 아사미를 포함한, 오디션장에 모인 여성들은 자신처럼 느끼고,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는 오디션 장면을 길게 보여주면서 일본 가부장제 사회가 평소 여성에게 얼마나 폭력적인 시선을 가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가정: 트라우마가 피어나는 곳
오디션을 계기로 아사미와 연인이 된 아오야마는 자주 만남을 가지며,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눈다. 아사미는 학대받았던 어린 시절을 아오야마에게 털어놓고, 이미 냉정함을 잃어버린 아오야마는 그녀의 상처까지 받아줄 수 있다 자신하며 결혼을 결심한다. 핑크빛 기류가 지속될 것이란 아오야마의 기대와 달리, 단둘이 여행을 떠난 이후 아사미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때부터 영화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무거워진다. 아사미가 작성한 지원서와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아오야마는 아사미를 찾기 위해 발로 뛰어다니고, 추적을 통해 그녀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아사미는 양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하게 된다. 그 학대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 화로에서 달궈지는 인두, 사색이 된 어린 아사미의 얼굴과 폭력의 상황을 그저 놀이처럼 여기는 양아버지의 얼굴, 서늘함이 감도는 발레 학원의 풍경 등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장면들을 통해 아사미가 어떤 학대를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폭력으로부터 아사미를 보호해 줄 사람이 부재하는 공간에서 아사미는 현실을 피하기 위해 발레에만 몰두하지만, 허리를 다치면서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 인형, 양아버지의 장난감, 타의로 잃어버린 꿈. 깊게 박혀버린 트라우마는 아사미의 다리에 새겨진 흉터처럼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적절한 처벌을 받지 않은 가해자에게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다. 양아버지를 찾아온 아오야마가 아사미의 행방에 관해 묻자, 되려 그는 아사미와 아오야마가 가졌던 사적인 관계를 직설적으로 물으며 실실 웃기 바쁘다. 그 질문은 아사미에게 모욕감을 주지만, 양아버지에게는 그 모욕감이 재미인 셈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환경. 이런 가정환경에서 생존한 아사미는 미스터리하다기 보단,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달리 보이게 된다.
피의 현장: 살기 위한 몸부림
영혼이 조각날 만큼 지독한 폭력에 노출되어 온 아사미는 뒤틀린 자아를 갖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닐 법한 기쁨이나 사랑을 느껴본 적 없던 그녀는, 모든 감정 표현을 살인과 고통으로 대체한다. 양아버지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신체까지 차례대로 조각내고 살해한 뒤, 마침내 아오야마의 앞에 나타난 아사미는 말한다. 정말 괴로울 때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신경만 깨워놓은 채 아오야마가 움직이지 못하게끔 마취를 시킨 아사미는 그의 몸 곳곳에 침을 놓으며 본색을 드러낸다. 아사미는 아오야마가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오디션으로 여자들을 잔뜩 모아서 거기서 탈락시키고, 나중에 연락을 하죠. 결국 섹스가 하고 싶었을 뿐. 모두 다 똑같아.” 아사미의 대사는 여성 지원자들을 재단 위에 올려놓고 인형 취급을 하던 아오야마의 전적을 떠올리게 하며, 동시에 가부장적인 일본 사회를 관통한다.
아사미의 뒤틀림은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이전에 그녀는 꾸준히 아오야마에게 “나만 사랑해야 해요”라는 말을 꾸준히 내뱉은 적 있었다. 단지 사랑의 표현으로 보이지만, 이 문장이 가진 집착은 아사미가 아오야마를 고문하면서 스산하게 바뀐다. 사랑의 범주 안에 본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 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가 들어오는 순간 아사미는 아오야마를 거짓말쟁이로 치부하고 더 큰 고통을 선사한다. “내 전부를 드려도, 내 전부가 되어주진 않는군요.” 어긋날 대로 어긋나버린 아사미가 만들어낸 피바다는 그 잔혹함에 눈을 질끈 감게 되면서도 묘하게 통쾌하고, 아사미의 과거까지 복기해 보면 서글픔까지 섞이는, 복잡한 현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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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미 역을 맡은 배우 시이나 에이히는 자신이 연기한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사미란 캐릭터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게 불가능해서 자신 이외의 대상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큰 슬픔을 가진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배우의 인터뷰를 통해 보자면, 비록 공포영화지만 <오디션>은 가정과 사회에서 무자비하게 착취당한 여성의 수난사라고도 봐도 무방하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분명 <오디션>은 소문대로, 포스터 문구대로 무시무시한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함'에는 피, 침, 시체, 고문 기구, 비명만 있지 않다. 행복은 고사하고 평범함마저 잃어버린 한 인간의 삶,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차별적 시선, 정상의 범주에서 이탈한 사고, 평생을 따라다니는 트라우마, 사그라지지 않는 슬픔. <오디션>이 '죽기 전에 봐야 할 최고의 공포 영화'라면 바로 이 점까지 포함되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