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보다 더 깡말랐던 초등학생의 나는 봄을 가장 즐겼다. 일단 존경했던 선생님이 봄을 좋아했다. 선생님은 뜨거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쥔 손이 초봄에 유독 서늘하게 느껴져 좋다고 했고, 커피 맛도 모르던 나는 그대로 봄의 첫머리를 동경했다. 이 외에도 추위를 잘 타서, 꽃이 피니까, 생일이 있는 계절이라서. 봄을 반기는 이유는 툭툭 던질 수 있을 만큼 넉넉했지만 무엇보다 봄은 내게 달릴 이유가 되어주었다.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계시를 받은 듯 기쁜 마음으로 밖으로 나가 뛰어놀았다. 겨울에 웅크린 만큼 온몸을 펼쳤다. 그래도 되었다. 봄이 왔다는 이유만으로.
봄은 시작만이 좋은 게 아니었다. 봄의 절정에, 따뜻한 바람은 살갗을 뚫고 마음까지 도착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면 마음은 간지럽히는 대로 간지러워져서 등굣길에는 실내화 가방을 괜히 더 크게 흔들기도 했다. 봄 냄새에 어지럽다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5월. 봄이 끝나가는 이 시점이 내겐 단연 최고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5월은 운동회의 달. 봄의 끝물마다 운동장에는 매년 운동회가 열렸다. 마른 몸의 이점 중 하나는 공기를 흘려보내기 쉽다는 것이고, 그에 더해 내 다리는 빨랐다. 6년 내내 반 대표 계주의 몫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반짝반짝 모래알. 흰색 체육복에 붙은 청팀 스티커. 몇 번이고 고쳐 묶은 운동화 끈. 친구들의 김밥 도시락. 그 옆에 우리 엄마표 주먹밥 도시락. 모든 게 괜히 자랑스러웠다. 작은 것에 우쭐할 줄 아는 가슴. 달리는 데 주저함 없는 나이. 계주가 당연한 두 다리. 출발선에 서서 호루라기 소리를 기다리며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거쳐, 마침내 내달린다. 운동회는 나의 작은 무대. 친구들의 응원 소리와 학교의 풍경과 모래바람을 통과한 후 결승선을 가르면 손등에 찍히는 1등 도장. 그때의 결승선은 내게 뿌듯함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결승선을 통과하다가 어느 봄에 중학생이 되었다. 달리기가 사라진 건 이즈음부터로 추정된다. 달리기 대신, 조금이라도 앞머리가 흐트러지면 빗으로 정렬해야 하는 여자아이들이 내 옆에 있었다. 초등학생 때였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으면 꼭 한 명씩은 내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넌 여자냐 남자냐? 처음 보는 선배까지도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수고를 거쳐 내게로 와서 그런 소리를 했다. 그 한마디가 벼락같았다. 누가 봐도 여자아이인 내 겉모습을 보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공을 뻥뻥 차고, 남자아이들과 패스를 주고받는 내 움직임을 지적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내 몸이 순식간에 수치스러워졌다. 그래도 다리를 멈추지는 않았다. 멈추기엔 너무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나. 초등학생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날, 학교가 끝나면 또 축구를 했고 또 그런 소리를 들었고 또 운동장을 달리고 공을 찼다.
하지만 중학생의 내겐 그런 뻔뻔함이 없었다. 혹은 없어졌다. 혹은 없어야 했다. 학교는 내 세상이었고 친구는 내 전부였으며 혼자가 되는 일은 징벌과도 같아 보였다. 무리에서 적당히 어울리려면 꼬리표가 붙는 건 무조건 피해야 했다. 중학교 운동장은 남자아이들만의 공간. 그 속에서 여자인 내가 축구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초등학생 때 남자아이들은 친구였지만 중학생 때 남자아이들은 주인이 되어 있었다. 운동장에 들어가려면 그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도 체육시간에도 운동장은 남자아이들의 독무대였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친구들과 운동장 조회대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뿐이었다.
운동장이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운동이라는 행위 역시 그들의 전유물 같았다. 운동장 한구석에서 공놀이를 하는 몇몇 여자아이들을 보고 친구가 “찐따X들”이라고 읊조렸을 때, 내게 남자냐 묻던 목소리들이 겹쳐 들렸다. 직감했다. 이제 난 절대 마음껏 달릴 수 없다. 축구 대신 피구를 시키면 네네 알겠습니다. 어쩌다 찾아온 반 대항 여자축구 경기에서도 설렁설렁 대충대충. 운동회 계주를 정할 때면… 하고 싶다는 마음을 꾹 누르듯 고개를 푸욱. 실컷 달리면서도 별종이 되지 않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안전하고 싶었던 나는 달리기 대신 앞머리를 사수하는 쪽을 택했다. 나의 작은 무대는 그렇게 사라졌다.
봄이 와도 달리는 일은 없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