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늘 이런저런 엉뚱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바빴다. 거의 매일같이 지나간 일을 곱씹거나, 다가오지도 않은 일들을 미리 걱정하느라 정신이 분주했다. 고인 생각을 나름 건강하게 흘려보내는 데에 ‘글쓰기’가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걸 깨달은 이후, 일상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과정은 내게 중요한 치유이자 취미이자 습관이 되었다.
다시 보면 완성도도 낮고 흐지부지 끝나버린 시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만드는 행위’ 자체는 분명 나를 현실에 몰입시키는 방식이자 스트레스를 견디게 하는 안전지대가 되어주었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현실에 쉽게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뭐 이유야 어찌 됐든, 만드는 걸 계속했다. 초등학생 때는 그림책을 만들었고, 중학생 때는 소설을 썼으며 (결코 다시 읽고 싶지 않다), 대학생 때는 이미지와 글에 소리까지 얹혀 영상을 제작했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니, 내가 쌓아온 모든 활동은 결국 ‘콘텐츠 제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었다. 진로를 고민해야 할 시기가 오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왔던 ‘만들기 활동’으로 돈을 벌겠다고 마음먹었고, 콘텐츠 에디터라는 직업을 택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든, 일로써든, 사부작사부작 무언가를 만들어왔지만, 창작 활동에 전제되는 ‘창의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난 내심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갖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바로 그 간극을 이해하고자 책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를 읽게 됐다.
책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는 우리가 왜 그토록 ‘창의성’을 맹목적으로 좇게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책은 초반부에서, ‘창의성’이라는 개념이 매력적으로 여겨졌던 이유를 ‘천재성’, ‘지능’, ‘상상력’, ‘발명성’ 등 여러 특장점을 아우르는 단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창의성은 영웅적이면서도 민주적이고 낭만적이면서도 실용적이며,
사회적 문제와 심리학 내부의 문제 모두에 대한 해답처럼 보였다."
- 책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中
창의성은 위대한 개인의 능력인 동시에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자질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낭만과 실용을 아우르며 예술과 기술 모두를 오갔다. 창의성은 이질적인 차원의 경계에 선 덕에 그만큼 다양한 분야와 욕망을 흡수할 수 있었고, 결국 모든 시대의 해결사로 자리 잡게 됐다.
책은 이처럼 매력적인 개념이 사실은 특정 시대의 이해관계자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을 중반부에 걸쳐 다양한 근거를 들어 강조한다. 광고업계에서 고안한 브레인스토밍 기법은 ‘기업’이라는 이해관계자를 통과하며 효율과 성과 중심의 언어로 '창의성'이 재정의된 대표적 사례다. 이 외에도 저자는, 심리학과 교육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요구에, ‘창의성’이 점차 도구화되고 전략적으로 활용되어 왔다고 말한다.
“브레인스토밍은 근본적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 브레인스토밍은 일종의 통제된 혁명이었다.”
“브레인스토밍의 진짜 문제는 창의적 과정을 단편적으로 다루고
이를 생산 라인에 올려놓음으로서 왜곡한다는 데 있다.”
- 책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中
언뜻 개인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감각 혹은 인간이 개발할 수 있는 이상적인 능력처럼 인식되는 ‘창의성’이 특정한 시대적 조건과 사회 구조의 필요에 따라 재편된 개념 혹은 급부상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은,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찰이다.
“이미 1960년대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창의성’이 연구자들이 긍정적으로 여기는 다양한 특성을 포괄하는
일종의 만능 용어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창의성이라는 용어가
이해의 장벽이 되고 있으며 불필요한 것이므로
버려도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책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中
콘텐츠 업계에 들어선 건, 만들고 상상하는 작업을 비교적 수월하게 해내는 내 성향에 변화가 잦고 아이디어가 중시되는 이 업계의 분위기가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창의성’은 콘텐츠 제작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요소였지만, 현업에서는 창의성만큼이나 중요한 다양한 역량들이 맞물려 시너지를 냈다.
기발한 아이디어보다도, 기획한 바를 일정 내에 구현해 내는 실행 계획이나 클라이언트 및 인터뷰이와의 커뮤니케이션, 자료 정리와 일정 관리 등 다소 번거롭고 지루한 일들이 오히려 결과물의 완성도와 협업의 매끄러움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았다.
‘창의성’이 시대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 만들어지고 소비된 개념이라는 책의 고발은, 대부분의 지배적 개념이 당대의 조건을 반영해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을 읽고 우리가 환기해야 할 부분은 시대가 내세우는 특정 키워드를 무작정 숭배하지 않고, 다른 가치들의 중요성 역시 고루 인식하고 조율하는 균형 감각일 것이다.
“팬데믹은 거의 즉각적으로
‘필수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재구성했다.
그간 창의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직업들
-가금류 공장 노동자, 식료품점 직원, 간호사, 배달 기사 -이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었다.
우리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돌봄, 유지
그리고 물질적 재화로 이뤄진 기반 시설이
우리 모두를 살아가게 한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책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