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제 도서전
2025년의 서울 국제 도서전이 끝났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명절(왠지 축제보다 명절이 더 정겹다)이라는 서울 국제 도서전. 사람이 많을 거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도 많이 해서인지, 걱정한 것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사람들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양팔을 미라처럼 접어서 날 감싸안고 다녔지만 말이다.
사실 내가 느끼기에는 대형 출판사가 도서전에서 갖는 메리트가 매년 줄어드는 것 같다. 그들이 도서전에서 파는 책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온오프라인 서점에서도 계속 살 수 있는 책들이다. 굳이 도서전에서 책을 사야 할 이유가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 사면 10% 할인이 되니까 가격 측면의 혜택도 없다.
원래는 출판사 직원들이 직접 해주는 큐레이션, 그리고 참여 부스 같은 것들이 큰 매력이 된다. 도서’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전시’의 요소들. 출판사 SNS에서 먼저 본 책들도 직원분이 내게 말을 걸며, 또는 손수 쓴 글로 소개해 주시면 왠지 더 흥미롭다. 하지만 이번에는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이런 큐레이팅을 제대로 즐기기도 어려웠다.
아, 굿즈가 있다. 화려한 굿즈 라인업이 도서전의 본질을 흐린다는 의견도 있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과도기 없이 찾아오는 변화는 없다. 굿즈가 도서전 흥행의 주요 요소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굿즈는 배포용, 판매용, 그리고 구매한 도서와 함께 주어지는 증정용, 이 정도로 나뉜다. 굿즈들은 도서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 굿즈가 우리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고 또 출판사들도 그걸 잘 알아서 참 기막히게 만들어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갔을 때는 대부분의 굿즈가 품절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돈을 아낄 수 있었다.
책마을
잘못 말했다. 나는 돈을 아낄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대형 출판사로부터 지갑을 지켰을 뿐이다. 보통 도서전 입구에서부터 구경을 시작하면 대형-중형-독립 출판사 순서로 보게 된다. 그러면 견물생심이라는 인간의 순리에 따라 당장 보이는 대형 출판사에서 대부분의 돈을 쓰게 되고, 후반부의 독립 출판사 구역, ‘책마을’에서는 맘에 드는 책이 있어도 내려놓게 된다. (나는 도서전에 갈 때마다 최대 한도 금액을 정하고 간다. 나만 그런가? 그리고 항상 초과한다. 나만 그런가?)
하지만 도서전의 진짜 묘미는 후반부에 있다. 대형 출판사와 달리 독립 출판사들은 정말 모르는 출판사들이 모르는 책을 들고 오기 때문에 새로운 책을 많이 만난다. 그리고 그런 책들은 일반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경우도 왕왕 있다. 도서관에도 잘 없다. 이래저래 대형 출판사보다 메리트가 큰 셈이다. 그래서 올해는 1인 출판사에서 제대로 놀기 위해 대형, 중형 부스를 다 건너뛰고 책마을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점은 역시 가격이다. 독립 출판사들은 대부분 소량 제작이고, 예술 도서인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대형 출판사 도서보다 가격대가 높게 형성되어 있다.
어쩌면 실제로 비싼 게 아니라, 비싸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낮은 신뢰도’에서 오는 은은한 불안이 가격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 것일지도. 줄 서서 먹는 맛집의 식사가 2만 원이면 비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텅텅 비어서 리뷰도 없는 식당의 식사가 2만 원이면 앞의 사례보다 더 큰 거부감이 더 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형 출판사 책들은 출판사도 알고 작가도 알고 후기도 많은데(그러고도 별로인 책들을 수시로 만나는데), 출판사도 잘 모르고, 작가는 처음 보고, 후기는 더 생소한 독립 출판사 책을 대뜸 사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믿을 수가 없’으니까.
믿을 구석
<믿을 구석>. 도서전은 매년 하나의 주제를 정하는데, 올해의 주제는 ‘믿을 구석’이었다. 읽자마자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주제다. 책은 우리의, 인류의 믿을 구석. 하지만 올해의 도서전은 오히려 못 미더웠다. 사유화니, 얼리버드 매진이니 말이 많았다. 나도 주말에 한번, 평일에 한번 가고 싶었는데 표가 없어 결국 일요일만 가게 됐다. 어쨌든 하루라도 갈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지만, 믿을 구석의 믿음직하지 못한 순간들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야 말았다.
시작이 이래서인지 이번에는 믿을 구석으로, 도서전으로 가면서도 마냥 신이 나지는 않았다. 작년 평일에 갔을 때도 사람이 많아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전일 매진인 데다가 주말의 코엑스라니, 상상만으로도 피곤해져서 봉은사역에 내리자마자 카페인을 긴급 수혈했다. 운영도 이래저래 수상하고, 마지막 날 하루만 가게 된 것도 아쉽고, 사람에 치여서 제대로 구경을 못할 수도 있을 테고. ‘책마을이나 잘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갔다.
꾸역꾸역 간 것 치고는 잘 놀긴 했다. 한 시 반쯤 들어가서 다섯 시 마감에 나왔으니. 사실 일곱 시 마감인 줄 알고 있다가 허겁지겁 나온 거였다. 시간의 절반 정도는 책마을에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중형과 대형 부스에서 썼다. 그 ‘책마을이나 잘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참 열심히도 움직인 셈이다. 내 무거운 발을 움직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저 ‘믿을 수 없는’ 줄 알았던 독립 출판사의 책들이었다.

최후의 보루
전시 제목 <믿을 구석>의 영어 제목은 The Last Resort가 되었다. 충분히 납득 가능한, 아니 꽤 정확한 의역이지만, 저 번역은 믿을 구석보다 더 절박한, ‘최후의 보루’라는 느낌이 강하다. 영화 제목이 ‘믿을 구석’이면 가족이나 친구의 끈끈함을 주제로 하는, 소소한 감동과 소소한 재미를 주는 독립 영화 같다. 하지만 ‘더 라스트 리조트’가 제목이라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 같다(그리고 이런 건 꼭 번역을 안 하고 음차를 제목으로 쓰더라). 이 번역이 불만이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두 제목이 주는 느낌은 분명 다르다. 믿을 구석에 오면 안도의 눈물이 흐르겠지만 최후의 보루에 오면 피눈물이 흐르겠지…
어쨌든 저 번역에 불만이 없는 이유는, 이러나저러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책은 믿을 구석이고, 책은 최후의 보루다. 믿을 구석이 되어주는 책은 아늑하고, 최후의 보루로 기능하는 책은 딴딴하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먼저 떠올리는 책, 여러 사람의 눈과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신뢰도’ 높은 책들은 정말로 믿을 구석이 된다. 나도 이 믿을 구석을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내 발이 정작 찾아간 것은 최후의 보루였다. 땅 위로 보이는 건 이파리 하나라 신뢰도는 낮을지언정 땅 밑으로는 좁지만 깊이 뿌리를 내리고 버티는 마지막 잎새 하나.
대형 출판사의 책들이 믿을 구석, 독립 출판사의 책들이 최후의 보루라고 할 때, 예전에는 후자의 책을 살 때 최후의 보루를 응원하며 그들이 ‘믿을 구석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런데 올해는 아예 독립 출판을 주로 다루는 도서전, 전주책쾌에 다녀오기도 하고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책마을 위주로 봐서인지 조금 마음이 달라졌다. 최후의 보루를 응원하는 마음은 같지만, 그게 믿을 구석이 되길 바란다기보다는 정말 최후의 보루로 ‘잘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