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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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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8년 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8일 후'의 후속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며 농담처럼 '28주 후'를 없는 셈 쳤던 시리즈의 팬들이 기다려온 "이번엔 진짜"일 후속작이 마침내 개봉했다. 하지만 이번 후속작도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 걸까. '28년 후'가 개봉한 지 열흘이 지난 지금, '28일 후'의 후속작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FPS 게임을 플레이하는 듯 활을 겨눌 때 시점을 달리하는 화면과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와 주인공의 출정식이 교차되며 심장을 쫄깃하게 했던 초반부는 대체로 호평이다. 하지만 영화가 전환점을 맞이한 이후, '28년 후'의 중후반부에는 좀비와의 숨 막히는 추격전도 빽빽하게 포위된 상황에서의 긴박한 탈출 상황도 나오지 않는다. 흔히 "좀비물"이라고 하면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장면들은 초반부에 몰아치고 그 뒤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고편의 거대한 알파와 미친 듯이 뛰어오는 좀비를 기대하며 왔던 관객들은, 일견 성장드라마이자 가족드라마로 보이는 이 나머지 1시간 여의 시간 동안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대니 보일 감독은 왜 전형적인 좀비 영화의 문법을 깨고 이토록 조용한 좀비 없는 좀비 영화를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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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아일랜드, 죽음과 밀물만큼 떨어진 공간


 

'28년 후'는 그 제목처럼 분노 바이러스 창궐 후 28년이 지난 시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스파이크가 나고 자란 곳은 영국의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홀리 아일랜드(린디스판 섬). 본토와 홀리 아일랜드를 잇는 도로는 밀물 때는 잠겨있기에 이곳의 사람들은 분노 바이러스 감염자들에게서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가 성인이 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메인랜드로 건너가는 '출정'을 해야 한다. 오늘은 어린 소년인 스파이크가 생애 처음으로 감염자를 사냥하는 출정식 날이다.

 

 

“I—have—marched—six—weeks in hell and certify

It—is—not—fire—devils, dark, or anything,

But boots—boots—boots—boots—movin’ up and down again,

And there’s no discharge in the war!

Try—try—try—try—to think of something different

Oh—my—God—keep—me from going lunatic!”

 

- 시 "Boots", Rudyard Kipling

 

 

스파이크가 아버지 제이미와 함께 다리를 건너 본토로 들어올 때, 본 영화에서 가장 숨죽이게 되는 시퀀스가 전개된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Boots'의 낭송이 점점 그 속도를 빨리하며, 주인공의 상황과 이전 영국 역사의 교차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메인랜드는 비감염자보다 감염자가 많은 좀비의 땅이다. 부자는 느리게 진화한 '슬로우로우'를 사냥하고 감염자 무리를 이끄는 '알파'에 쫓기며 간신히 홀리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그날 스파이크는 처음으로 '죽음'과 가까이 조우한다. 죽음의 감각을 잊지 못한 그 상태 그대로, 돌아온 스파이크를 위해 연회가 벌어진다.

 

홀리데이 아일랜드로 돌아온 제이미는 메인랜드의 든든했던 조력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마치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했던 것처럼 그날의 무용담을 소개한다. 죽을 뻔했음에도,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 같은 행동은 '28일 후'의 군인 무리와도 비슷하다. 죽음을 계속 상대하다 죽음에 무뎌진 사람들. 죽음을 잊기 위해 말초적인 쾌락, 여자, 를 제공하기로 약속한 무리의 대장처럼.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스파이크가 하지도 않은 업적을 치하하고 다른 여자와의 불륜을 자행한다. 스파이크는 바로 같은 날, 제이미를 통해 바깥세상을 처음 경험했다.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자신이 잡지 못한 좀비를 빠르게 활을 쏘아 잡는 강한 수색대원. 스파이크는 이를 자신의 미래라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불륜을 목격했을 때, 그리고 아버지가 이를 따지는 스파이크의 뺨을 내리쳤을 때, 강한 아버지의 등을 따르던 세계는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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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데이 아일랜드는 변화한 세상 속에서 기존 세상과 유사한 질서를 지키기 위해 가장 노력하는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라던가 가족 단위라는 이전 세계의 제도들이 남아있다. 장벽 밖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며 나름대로 죽음을 추모하며 살아가지만 그 장벽 내에서는 그런대로의 정상 생활을 영위하는 곳. 마시면 기억을 잃는 레테의 강물처럼 그 물에 잠긴 유일한 통로를 지나면 어느 정도의 망각이 진행된다. 스파이크의 어머니, 아일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일라는 분명 죽어가고 있다. 정신 착란을 보이고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사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유로 아일라를 그저 침대에 가만히 둔다. 1층의 공간과 분리된 2층, 시야에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이 또한 죽음에서 거리를 두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의사는 있었고, 비록 미쳤을지라도, 스파이크는 아일라의 손을 잡고 죽음의 세계로 도망친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스파이크는 홀리 아일랜드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장소인 메인랜드의 해골 탑으로 향한다. 닥터 켈슨은 시체를 모아다가 커다란 불에 태우고, 물에 깨끗이 씻어 살점 하나 붙어있지 않은 반반한 머리뼈로 소중히 탑을 쌓는다. 생명을 살려야 하는 의사가 죽음을 보내는 장의사가 되었기에 섬 안의 사람들은 그를 미친 의사라고 부른다. 높이 솟아오른 여러 유골 사이를 지나며 닥터 켈슨은 영화에서 가장 뚜렷하게 들이대는 명제를 스파이크에게 설명한다.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이 고전적 가르침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된 구조물이 바로 이 세계관 속 가장 죽음에 가까운 곳인 닥터 켈슨의 해골 탑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료할 수 없는 암을 판정받은 아일라는 죽음을 선택한다.

 

 

Dr. Kelson: Spike, memento mori, what did it mean?

Spike: Remember we must die.

Dr. Kelson: And it's true. There are many kinds of death. Some are better than others. The best are peaceful where we leave each other in love. You love your mother?

Spike: I love her.

Dr. Kelson: And Isla you love Spike?

Isla: So much.

Dr. Kelson: Memento amorous. Remember you must love.

 

"28년 후", 대사 중

 

 

아일라가 도착하고 죽음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이 다소 지나치게 빠르다는 생각은 든다. 눈짓 한 번에, 대화 한 번에 안락사가 결정된다니. 그리고 돌아온 어머니의 유골에 놀라는 장면 하나 없이 바로 상황을 받아들이다니. 적극적 안락사를 금기시하는 대한민국 사회를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성이지만, 이곳은 어쨌든 분노 바이러스가 발생한 평행 세계이니까. 이때 닥터켈슨과 스파이크의 대화는 아마도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에 가까울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고, 사랑을 기억하라. 언젠가 찾아올 수밖에는 없는 죽음이라면 그것을 사랑으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나은 죽음의 형태일 것이다. 스파이크는 죽음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홀리 아일랜드를 떠났고, 메인랜드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직시하고 받아들였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카르페 디엠. 현재를 살아라.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서로 닮아있는 이 라틴어 구절들의 개수와 '28년 후' 3부작의 개수가 공교롭게 맞아떨어지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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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년은 아버지를 떠난 데 이어 어머니를 보낸다. 스파이크는 메인랜드로 가는 도로를 총 세 번 건넌다. 첫 번째는 제이미와 함께한 출정식 날, 두 번째는 아일라와 함께 건넜던 탈출의 날, 그리고 마지막은 아이를 섬에 데려다주고 나온 독립의 날이다. 스파이크의 성인식은 이렇게 총 세 번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은 아버지와, 두 번째는 어머니와 넓은 세상으로 나왔지만 마지막은 결국 혼자. 이 영화가 좀비물의 탈을 쓴 소년 성장 영화라고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파이크는 아버지에게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는 편지와 함께 감염자 산모에게서 태어난 비감염자 아이를 남긴다. 도망에 가까웠던 두번째 메인랜드 행과는 달리 마지막 스파이크의 발걸음은 조금 더 가볍다. 죽음을 마주하고 기억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로 단단히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함께 데려오지는 않는다. 아이는 평화롭고 안전한 그곳, 홀리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 하니까.

 

 

 

왜 좀비 영화여야 했는가: 28일 후에서 28년후까지


 

시리즈 팬들의 분노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초반의 영화와 후반의 영화는 마치 두 개의 다른 장르를 섞어놓은 것 마냥 급작스레 변화한다. 좀비가 있는 좀비 영화와, 좀비가 있는 세상이 존재하는 좀비 없는 좀비 영화. 장르적 기대감과는 달리 '28년 후'는 감염병 이후의 세계에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묻는다. 영화는 추격전보다 선택과 이별, 그리고 기억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좀비를 더 이상 공포의 주체가 아닌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배경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28일 후'의 시작에서 주인공 "짐" 또한 분노 바이러스 사태가 발발한 28일 후, 좀비도 사람도 없는 거리에 목적지를 잃은 채 서 있지 않던가. 그러니까 굳이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선택하며 동시에 "~후"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좀비 자체보다도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리라. 분노 바이러스의 질병 경과를 따지자면 28일 후는 급성기, 28주 후는 아급성기, 28년 후는 만성인 셈이다. 만성 질환에서는 질환으로 인한 증상에 맞춰 생활 습관을 관리해야 한다. '28년 후'라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분노 바이러스 사태가 발발하고 시간은 이미 많이 흐른 상태.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화했고, 그 변화에 맞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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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시대를 표현한 '28일 후'에서 구조를 미끼로 여성들을 노리는 군인 집단, 공포와 권력을 결합해 생존을 가장한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 욕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 '28년 후'에서는 이 폭력의 시대를 지나, 욕망부터 중요한 가치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삶보다는 죽음이 더 가까이 있는 세상, 분노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영국은 격리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소년에게 빠르게 죽음을 보여줄 수 있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홀로 설 수 있는 그런 조건의 세상. 생명의 연장을 기대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을 사랑으로 떠나보낼 자유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부터 이미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떠나보낸 한 소년, 지미. 그는 스파이크보다도 먼저 죽음을 직시했으며, 먼저 나름의 '성인식'을 치른 인물이다. 그가 나타나는 엔딩 시퀀스를 쿠키영상으로 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지미는 결국 스파이크가 되었을 수도 있는 미래다. 영화의 시작, 텔레토비를 보던 아이는 사라지고 징벌의 일환으로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좀비를 칼로 썰어버리는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 목걸이를 한 묘하게 펑키한 지도자가 된 지미. 분노 바이러스 세계관에서 어른이 된 이 두 명의 '뉴 제네레이션'은 후속작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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