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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성공은 결국 재능과 같은 운으로만 결정되는가.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히 재능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일까. 호기심 삼아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전부터 보고 싶었던 알폰스 무하 전시회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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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전시장 입구 사진>

 

 

사실 난 알폰스 무하가 초면은 아니다. 지난 1월, 프라하 여행 때 알폰스 무하 관련 전시와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유려한 곡선이 마치 현대 애니메이션과 다를 바 없었고, 나는 그의 판화에 계속 시선이 갔다. 알폰스 무하는 곡선이 유려한 아르누보 양식 화가로 유명하다. 아르누보 양식은 자연의 곡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알고보니 무하는 현대 애니메이션과 순정문화 스타일의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알폰스 무하의 독특한 화풍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단순한 재능에서 비롯된 실력일까? 도슨트 방문 시간에 맞춰, 무하에 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무하는 8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갖고 있었다. 무하가 그린 <십자가에 못 박힘>이라는 그림에선 약간의 관절은 조금 어색하지만 명암을 표현한 방식과 전체적으로 고요한 분위기에서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무하가 제일 잘하는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무하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무하는 4년 간 성가대의 일원으로 마음껏 목소리를 뽐냈다. 하지만 사춘기에 찾아온 변성기 때문에 결국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무하의 어머니는 가정교사로, 아버지는 법원의 공무원으로 일을 했다. 무하는 아버지의 권유로 법원의 서기로 취직을 했다. 하지만 법원의 사무적인 업무는 그와 결국 맞지 않았다. 사건 명부와 같은 서류들은 무하의 그림 낙서장으로 변해갔다. 그는 홀로 계속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무하는 무대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극장을 장식하는 등 아마추어 연출가로 어시트턴트 업무를 하였다. 그는 그림 실력을 더 키우기 위해 정식 미술 교육을 가르치는 프라하의 아카데미에 지원하였다.

 

아카데미에 지원한 며칠 뒤, 무하의 어머니한테 편지 한 통이 도착하게 된다. 편지에 쓰인 글은 무하의 입학 거부였다. 사실 무하가 살던 시대엔 다양한 예술가들이 활약했던 천재들의 시대였다. 폴 고갱도 그 당시 활동했던 예술가였다. 편지에는 무하의 재능이 부족하여 아카데미에 입학을 시킬 수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결핵으로 인해 이복누나도 세상을 떠났으며, 잇따라 어머니도 잃었다.  무하는 연이은 가족의 상실이라는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무하는 우연히 신문에서 무대 공방에 필요한 장식 화가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바로 지원하였다. 합격 후, 무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하게 된다. 무하는 공방의 일로 자유롭게 극장을 드나들며 그림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방 장식 화가라는 일을 구한지 몇 개월 뒤, 1881년 12월, 링 극장의 화재로 공방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공방 직원들 중 제일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던 무하는 직장을 잃게 되었다. 무하는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나는 매우 흥분되는 한 순간에 놓여 있었다. 당황스러운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이 모든 일 뒤에 어떤 일이 닥쳐올 것인가? 모든 일이 다시 좋아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

 

어쩌면 최근 긍정적 사고를 뜻하는 원영적 사고의 시초가 아니었을까. 이후, 한 백작의 눈에 띄어 무하는 아카데미의 미술 공부 등 그림에 관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후원이 끊기게 되면서 아카데미를 그만두게 되었고, 생계 문제도 심해졌다. 그는 렌즈콩과 까치콩만으로 끼니를 때운 적이 많았고, 여전히 무명작가에 머물렀다. 무하는 생계 유지를 위해 인쇄소에 취업하게 되었다.

 

1894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파리, 무명의 화가였던 무하는 전설적인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요청으로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제작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인쇄소 직원들은 전부 휴가를 나가고, 무하만이 인쇄소 업무를 대신 해주고 있었다. 무하는 보조 작가로서, 혼자 끊임없이 그림을 연습해나갔다. 사라 베르나르는 연극의 성공 여부가 포스터 마케팅에 있다고 보았다. 그녀의 매니저는 결국 유일하게 일을 하고 있는 인쇄소에 있던 사람, 무하에게 연극 포스터를 부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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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스몬다 연극 포스터 원화>

 

 

무하는 지스몬다의 포스터를 판화 형식으로 디자인했다. 포스터의 중앙엔 접힌 듯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종이를 접은 것이 아니라 세로로 긴 그림을 만들기 위해 종이 2장을 합쳐서 판화를 찍은 것이다. 하지만 사라 베르나르의 매니저는 괜히 부탁했다며 이 포스터를 싫어했다. 베르나르가 결코 이 그림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때 당시 너무나도 혁신적인 그림이라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을까. 가치있는 혁신은 세상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휘한다.

 

사라 베르나르는 매니저와 달리, 그림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고 답하였다.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신비로운 분위기로 담은 판화가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지스몬다 연극 포스터가 게시된 이후, 사람들은 너무나도 고혹적인 그림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몰래 포스터를 뜯어가기도 했다. 이 작품 이후, 무하는 상업예술에서 크게 성공하게 된다. 이후 사라 베르나르는 지속적으로 무하에게 자신을 모델로 한 연극 포스터를 부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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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베르나르, 햄릿 연극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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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베르나르, 토스카 연극 포스터>

 

 

사라 베르나르는 파리의 벨 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유명한 여자 배우이다. 그녀는 햄릿, 나폴레옹 등의 연극에서 남성 배역까지 소화했다. 무대공포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복하여 평생을 연극에 바쳤다. 그녀는 69세 때에 무대에서 추락하여 한쪽 다리가 괴사한 적이 있었다. 괴사한 다리를 절단한 후, 한 쪽 다리로만 무대에 서는 등 연극에 관해 강한 열정을 보였다. 78세 때, 연극 리허설을 하다가 세상을 떠날 정도로 연극에 계속 몰입하는 사람이었다. 사라 베르나르의 부탁으로 인해, 알폰스 무하의 화풍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후 무하는 다양한 상품 광고 외주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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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의 자동분사 향수 "로도" 홍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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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의 페르펙타 자전거 포스터>

 

 

19세기 말 유럽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대중 소비 문화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이다. 철도망도 확장되고, 거리엔 백화점이 등장했다. 소비는 이제 단순히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문화적 경험으로 변화되었다. 기업들은 제품을 효율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이젠 텍스트보다 시각적 요소를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무하는 시장이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새로운 광고 현상을 만들어냈다. 무하만이 가진 유려한 곡선과 그림체는 제품의 단순한 홍보를 넘어 브랜드의 가치를 드높였다. 상품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우아한 곡선을 가진 의상을 입은 여성을 등장시켜, 고급스러움과 대중의 라이프스타일에 새로운 상징을 부여했다. 제품의 기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향수를 쓰거나 자전거를 타는 행위가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이란 인식을 부여했다. 무하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감성과 분위기의 이상을 형상화해 소비자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판 예술가가 되었다.

 

50대가 된 무하는 상업예술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삶에 공허함을 감지했다. 돌이켜 보니 자신은 상업예술에만 집중했지, 민족을 위한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공허감을 느낄 때 단순 오락이나 술에 빠질 경우가 많을텐데, 무하는 그렇지 않았다. 무하는 공공 예술의 원동력이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바로 민족을 위한 그림이다. 무하는 1902년에 그가 익혀온 예술적 정수를 담은 장식 자료집을 출간하였다. 그의 아르누보 양식의 그림과 더불어 미술의 원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예술 입문자를 위한 이 자료집은 여러 학교에서 미술 수업 교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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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입문자를 위한 무하의 장식 자료집>

 

 

무하는 자신이 속한 슬라브족에 관한 서사시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무하는 체코 문화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공공 프로젝트에 여럿 참여했다. 체코는 슬프지만 2번의 식민지 경험이 있다. 한 번은 오스트리아에, 나머지 한 번은 나치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1918년, 오스트리아로부터 체코슬라바키아가 독립하자 무하는 신생국의 정체성을 표현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국가의 지폐와 우표를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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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가 디자인한 코루나 지폐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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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가 디자인한 체코 우표 양식>


 

또한, 무하는 프라하 성 내부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도면을 제작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체코의 수호 성인들과 위인들이 등장하며, 다시 일어서는 체코의 정신도 녹아져 있다. 실제로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 중에 무하의 특유한 그림체가 독보였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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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도안>

 

 

무하는 슬라브족에 관한 자료 조사를 20년간 하면서 슬라브 서사시 작품을 18년 넘게 그렸다. 슬라브 서사시는 슬라브 민족의 신화와 역사를 주제로 한 20점의 대형 회화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몰수를 피하기 위해 학교에 작품이 은닉되었고, 독립된 후에는 체코의 공산정권화로 주목받지 못했다. 해당 서사시 작품들은 마이아트뮤지엄의 영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2026년까지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모두 보관하는 전용 전시관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2026년에 기회가 된다면, 프라하에서 무하의 전시관을 한 번 들려보자. 슬프게도 무하는 민족을 위한 그림을 그렸다고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나중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 심문을 받았고, 이후 석방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쇠약해져서 명을 마감했다. 무하는 국가의 공동 디자인 작업에도 사비를 들여서 참가했다. 그는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국민의 정신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하며, 돈이 아닌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공공예술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상업예술에서부터 시작된 무하의 별이 슬라브 민족에 관한 사랑으로, 프라하의 별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전시회를 보면서 성공은 재능으로 인한 순전한 운이 아님을 체감하게 된다.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꿈이 있다면, 스스로의 한계를 만들어 가두지 말자. 중학생 때 과학 선생님은 공부가 힘들 때면, 나는 공부가 재미있고 이미 잘하는 사람이라고 뇌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이미 성공한 사람처럼 뇌를 적극적으로 속여보는 건 어떨까. 도전하기도 전에 자신의 한계점을 스스로 찍지 말자.

 

누구에게나 잠재된 한 가지의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어떠한 경우라도 무하처럼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고 과감하게 그리고 꾸준히 도전해나가면 언젠가는 자신만이 가진 능력을 발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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