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났다. 전라남도 진도군 부근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해당 사건은 수많은 이들을 분노와 슬픔으로 내몰았다. 그로부터 8년이 흐른 2022년 10월 29일, 또 다른 절망과 조우하게 된다. 바로 이태원 참사이다. 누군가는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했고, 어떤 이는 먼 곳에서 그저 저물어가는 생명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결국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회귀하지만 그럼에도 상흔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든지 뻐근해지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에게는 상실의 앞에서 마음껏 애도하면서도, 남은 자들이 새로운 내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추동해 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2023년 개봉한 조현철 감독의 영화 <너와 나>는 미학적 재현을 통해 상실의 대상을 떠나보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서사를 써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을 회복하게 하는 애도서사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권도영, 영화 <너와 나>의 실존적 애도가 갖는 문학치료적 의미, 2023, 2P) 그렇다면 작품은 어떻게 우리의 아픔을 담아내고, 또 애도하고 있을까.
교차하는 플롯 속 빛의 힘
<너와 나>의 플롯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 한낮의 교실, 책상에서 엎드려 자던 세미는 하은이 죽는 꿈을 꾼다. 어딘가 불길한 세미는 다리를 다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하은을 찾아가 혼자 두고 갈 수 없으니 함께 가자고 설득한다. 그러던 중 갈등이 발생하게 되고, 충돌의 순간을 지나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는 밤이 찾아온다. 이때 눈여겨볼 지점은 꿈과 현실의 교차이다. 현실의 이야기를 전개하다가도 세미의 꿈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인물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던 중 어느 순간 화면에서는 세미의 꿈과 미래의 환상들이 오버랩(overlap)된다. 나중에는 우리가 현실이라 생각했던 것조차도 누군가의 꿈이 아니었는지 싶기도 하다.
’뿌연 화면‘은 이러한 의심에 힘을 실어준다. 실제로 조현철 감독은 “영화에서 빛이 주는 질감이 되게 중요했고, 꿈같아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촬영 감독님께 부탁드렸고, 필터를 많이 씌우는 방식을 채택하셨죠.”라고 밝힌 바 있다. 선명하지 않고 하얗게 번진 화면과 도드라지는 빛의 질감은 관객을 꿈의 세계로 초대한다. 더하여 감독은 뿌연 화면에 관하여 이런 말을 덧붙인다. “빛이 저에게 주는 느낌이 있는데, 저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사랑의 형태가 빛에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새벽에 깼을 때 그 여명 속에서 굉장히 무서운 기분이 들거든요. 불안하고, 무섭고, 왠지 죽음이 두렵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해가 나기 시작하면 그런 기분이 싹 사라져요. 아주 단순하지만 아주 본질적이고 익숙한 어떤 것. 그런데 잊고 사는 무엇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광량을 많이 높이고 인물들에게 그 빛이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더불어서 어떤 순간에는 그 빛이 관객의 눈을 향해 직접적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감독이 뿌연 화면을 택한 또 다른 이유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빛의 힘이 등장인물들, 그리고 스크린 너머 우리에게까지 닿길 바라며.
상처를 어루만지며
우리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2014년의 4월이 자리한다. 기억해야만 하는 지난날의 참사와 아픔을 다루는 너와 나, 이때 작품은 2014년에서 나아가 우리가 언제나 마주할 수 있는 상실까지도 어루만져준다. 이를테면 잃어버린 강아지의 주인을 찾아주는 사건이 있다. 세미와 하은은 공원에서 커다란 진돗개를 발견하고 그를 진식이라고 부른다. 진식이의 먹이를 사기 위해 잠시 편의점에 방문한 세미는 그곳에서 진식을 찾는 주인의 전단지를 보게 된다. 주인에게 연락하기 위해 다시 간 공원에서 진식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날 밤, 세미와 하은은 학교 운동장에서 진식을 보고 달려가는 그를 따라간다. 마침내 연락이 닿게 된 주인은 한걸음에 달려와 진식을 보기 위해 철장 안으로 넘어간다. 진식의 주인은 철장 안에서 반려견의 안부를 묻고 그 옆엔 세미가 있다. 작품 내에서 다루지 않는 시간인 수학여행 당일, 세미가 정말 세월호 사건과 같이 희생될 운명이라면 그는 ‘떠난 이’에 해당한다. 또한 진식 역시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로, 일시적으로 주인을 떠났기에 떠난 이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상실을 겪은 이로 하여금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철장 안은 상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세계라 볼 수 있겠다. 반대로 철장 밖은 상실을 겪는 주체들의 세계이다. 수학여행을 가지 않기에 희생되지 않을 하은은 자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세미와 여러 친구 떠나보내야만 할 것이고, 진식의 주인 역시도 그러한 상실을 경험하는 주체들이다. 그 사이를 결코 허물 수 없을 듯한 굳건한 철장이 지키고 있다. 그럼에도 진식의 주인은 그 철장을 넘는다. 그리고는 “똘똘아. 왜 거기 있어. 집에 가야지.”라고 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들은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벽을 허물고 기어코 떠난 이들의 세계로 향해 말을 걸어본다.
그날 밤 세미와 하은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며, 표면적인 갈등은 해소된다. 세미는 다음 날 수학여행을 위해 집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 두 사람이 헤어지며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세미는 “진짜 갈게.”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정말 갔다는 생각이 들 때쯤 다시 돌아와 “진짜 간다. 진짜 가?”라고 장난스럽게 말한다. 마치 보내주기 싫은 것처럼, 자꾸만 보고 싶은 것처럼. 그리고 세미가 떠나려는 순간 배경에 있던 장례식장 앞에서 사람들이 근조화환을 들고 이동한다. 이 또한 세미의 죽음을 암시하는 도구라 할 수 있다. 해당 장면은 떠난 이와 남겨진 이의 마지막 인사이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상실을 경험한 수많은 이들은 떠난 이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희생자들 역시 남겨진 이들에게 어떠한 말도 전하지 못했다. 조현철 감독은 맞닿지 못했던 이들을 닿을 수 있도록 한다. 서로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품고 인사를 거듭 건네며 결국 서로에게 전하지 못했던 그 한마디를 한다. “잘 가, 잘 있어”라는 말을.
너와 나의 애도 방식
조현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에 관해 설명하며 ‘슬플 애를 사랑 애로 치환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너와 나의 애도는 지금까지의 애도 영화와 조금은 다르다. 그들은 어떤 애도를 하고 있을까.
길을 걷던 세미는 우연히 죽은 새를 발견하고 땅에 묻어준다. 이때 화면은 세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음성은 전경에 위치한 제3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친구에게 자신이 죽은 병아리를 끝내 묻어주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오버랩은 마치 세미가 목소리의 주인을 대신하여 병아리를 묻어주는 듯하다. 떠난 자에 해당하는 세미가 또 다른 생명을 애도하는 것, 너와 나만의 애도 방식이다.
또한 영화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우리가 언제나 서로의 곁에 있음을 전한다. 대표적인 미장센으로는 ‘거울’과 ‘사과’가 있다. 먼저 거울을 살펴보자. 작품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거울은 오직 떠난 이인 세미를 비출 때만 나타난다. 거울은 존재의 실체를 온전히 담아내는 사물이다. 그러한 거울에 세미는 담긴다. 더는 형태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세미는 거울에 비추어지고, 감독은 이를 통해 그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사과의 역할 또한 이와 비슷하다. 작중에는 온전한 사과의 형태가 아닌 한 입 베어 문 사과가 등장하는데, 이때 중요한 지점은 그 모든 사과가 ’갈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과를 먹은 주체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떠난 이든, 남겨진 이든 그는 얼마 전까지 서로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결코 겹쳐질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감독은 이와 같은 미장센을 통해 떠난 이의 모습이 여전히 거울에 비치고 있음을, 사과를 베어 문 이가 아직 곁에 존재함을 제시하며 두 세계를 포개려 시도한다. 아직 우리가 서로의 곁에 존재한다고 말하며, 그렇게나마 상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서로를 떠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영화의 제목은 어째서 ‘너와 나’일까? 그 해답은 ‘꿈’에 있다. 꿈속 세미는 수학여행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집과 동네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함을 느껴 동네를 돌아다니는 세미는 그러던 중 풀밭에 엎드려 누워 있는 하은을 본다. 그리고 얼마 뒤 하은의 모습으로 교실에서 깨어나게 되고, 세미의 납골당에 간다. 일상으로 돌아와 아르바이트를 하고, 항상 함께 타던 202번 버스에 탑승한다. 하은이 되어 홀로 버스에 탄 세미는 애달프게 울고, 그의 아픔을 경험한다. ‘내가 네가 되는 꿈’을 꾸게 됨으로써 떠난 이는 남겨진 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꿈 속 죽어있는 얼굴이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 아빠 같기도, 지혜쌤, 우리반 친구들 같기도 했어. 그런데 결국은 그게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풀밭에 죽어있던 대상은 네가 됐을 수도, 내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해당 대사가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누워있던 하은의 얼굴은 세미의 얼굴로 전환된다. 감독은 이러한 연출을 통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누구나 그 대상이 될 수 있었음을 전한다.
‘너와 나’라는 제목처럼 영화 속 세미와 하은은 자꾸만 서로가 된다. 그 자리에 있던 건 네가 아닌 나였을 수도, 내가 아닌 너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떠난 이는 네가 되는 꿈, 그러니까 남겨진 이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꿈이라는 매개 속에서 세미는 하은을 이해한다. 보통 참사를 다룬 영화는 생존자가 희생자에게 말을 건네지만 너와 나는 조금 다르다.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희생자가 남겨진 이들을 끌어안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세미는 집으로 돌아와 반려동물 앵무새 조이에게 사랑한다고 연신 말한다. 사랑한다는 음성을 비집고 카메라는 풀밭에 엎드려 있는 세미의 얼굴을 비춘다. 화면 속 세미는 미소를 그리며 “조이 안녕, 갔다 올게”라고 말한다. 그 순간만큼은 “사랑해”라는 말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사랑해, 사랑해. 그토록 다정한 사랑이 메아리가 되어 화면 너머 우리에게까지 닿는다. 너와 나는 슬플 애를 사랑 애로 치환하는 영화. 더는 슬퍼하지 말라, 그러니 살아가라고 손짓하는 영화. 사랑한다는 말을 절실히 기다려왔던 누군가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너와 나의 사랑과 위안이 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