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5월 16일부터 8월 31일까지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 특별전이 열리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 다녀왔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는 17세기 네덜란드부터 20세기 주요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서양 미술사 주요 작품들을 한 장소에서 감상할 좋은 기회였다. 특히나 이목을 끄는 것은 전시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유명 거장들의 작품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등 미술계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을 마주할 생각에 입장 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전시는 미술사의 주요 흐름에 따른 9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미술관의 설립자인 필립스 부인으로 막을 여는 전시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기로 이어지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미술, 프랑스의 인상주의, 나비파와 큐비즘, 20세기의 아방가르드와 컨템포러리 아트까지 전반적인 서양 예술의 흐름을 따라 진행된다. 더불어 근래에 접어들어 주목받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예술가들에 조명하며 한국에서 생소했던 아프리카 미술에 집중한다.
취미 삼아 전시회를 다니다 보면 전과는 달리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미술을 잘 모르는 일반인의 시선에도 쉽게 걸리는 것은 바로 전시회의 구성이다. 어떤 흐름으로 작품을 설명할 것인지, 그림의 어떤 부분을 조명으로 비출 것이며 어떻게 그림을 돋보이게 할지에 따라 그 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결정된다. 같은 작품을 보여주더라도 의도되는 바에 따라 관객이 받는 느낌은 달라진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는 테마에 따라 달라지는 전시 공간의 색감으로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서양 예술사에 대해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해당 전시 공간은 노루 페인트에서 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9가지 구간에 사용된 총 13가지의 페인트는 작품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이때 전시는 무게감을 주며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브라운, 버건디와 같은 컬러로 시작하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서막을 알린다. 이후 전시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현대 미술사에서 분홍색, 연두색과 같이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페인트로 시공하며 관람객에게 몰입도 높은 전시 경험을 선사한다.
이번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는 작품의 과반수가 유리가 제거된 채 전시되었다. 그렇기에 촬영이 제한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럼에도 작품을 유리창 너머가 아니라 직접 두 눈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이점이었다. 붓 결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무료로 제공되는 오디오 가이드를 듣다 보면 작가의 시점에서 작품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의 제한 속에서도 발길을 잡아끄는 작품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 전시도 마찬가지로 143점이라는 많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그 앞에 서 있게 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존재했다. 주위가 블러처리 한 듯 희끄무레하게 사라지고, 작품과 나만이 남게 되는 잠깐의 순간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 듯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만이 경험할 수 있는 지극히 주관적인 소유물이 된다. 이번 글에서는 무엇보다 사적으로 보냈던 작품과의 시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셀트강의 입구-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1854)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의 “셀트 강의 입구”는 셀트 강의 입구를 유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셀트 강은 오래전부터 상업적, 위치적 전략지로 로마 시대부터 해상 교역 통로로 사용된 역사적 요충지이다. 이후 여러 차례 주변 나라로부터 분쟁 지역이 되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가 나누어 갖게 된다.
예로부터 많은 관심이 집중된 수로인 만큼 셀트 강을 주제로 하여 작품을 담아낸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의 The Mouth of the Scheldt나 루카스 판 팔켄 보르흐의 View of Antwerp with the frozen Scheldt, 외젠 부댕의 La Meuse près d’Anvers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셀트 강의 입구”에서 발걸음이 머물렀던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림의 1/4 이상을 차지한 거대하고도 압도적인 구름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햇볕이 들지 않아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범선을 집어삼킬 듯한 구름은 마치 선이 악을 물리치듯 공간을 독차지하며 자연의 위압감을 드러냈다. 극적으로 피어오른 구름의 입체감과 오묘하게 표현된 유화의 색채는 마치 캔버스 자체가 튀어나온 듯한 착시 효과를 자아냈다. 작품 속 풍성하게 부풀려진 적운을 바라보면 언젠가 맑은 하늘에서 보았던 구름이 떠올랐다. 셀트 강 보다 더 존재감을 내세우는 구름은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하늘로 연상되며 저절로 구름에 대한 환상이 가득했던 유년기의 추억으로 이어졌다.
목가- 요제프 이스라엘 (1891)
요제프 이스라엘은 장 프랑수아 밀레와 유사한 주제와 화풍으로 자주 비교되는 네덜란드의 예술가이다. 그는 화려하고 빛이 나는 상류층을 작품의 대상으로 하기보단 인간적인 삶에 주목했으며 주로 낭만주의 양식의 작품을 그려왔다. 그 중 “목가”는 드넓은 농지를 배경으로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어딘가로 걸어가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목가” 속 두 명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농민의 옷차림이다. 소년은 한 손에는 나뭇가지를 들고 한 손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며 소녀는 바구니를 품에 안고 있다. 포근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에서는 일말의 위험이나 장애물의 요소가 느껴지지 않는다. 직관적으로 묘사한 그림은 숨겨진 의도를 해석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관람객은 그림 앞에서 무의식중에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나는 작품에서 다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치유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그림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하염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림에 이끌렸다.
이브- 오귀스트 로댕 (연도 미상)
청동시대,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또한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었다. 양팔로 상체를 감싸안은 채 고개를 한쪽으로 숙인 여성의 전신은 여성만의 신체에서 드러나는 곡선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브론즈로 조각된 “이브”는 미켈란젤로로부터 받은 영향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아담”과 같은 해인 1881년에 제작된다. 이브는 특히 모델인 안나 아브루제치가 이브 제작 도중 임신을 하게 되자 로댕이 변화하는 몸의 굴곡을 반영하여 조각상을 계속해서 수정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미술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지체없이 조각상이라고 대답할 만큼 나는 조각상을 좋아한다.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움직임이 초라해 보일 만큼 역동적이고 파격적인 순간을 포착해 낸 조각상을 볼 때면 작가에 대한 경외감이 쏟아져 나왔다. 시간이 영원히 멈춰져 버린 조각상 앞에 서면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으로서 한계마저 체감되곤 했다.
이번에도 역시 로댕의 이브를 보자마자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각상은 파란 배경과 단상 위에 외로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관중의 시선에 쏟아지는 곳에는 다름 아닌 조각상이 가리고자 하는 얼굴이 존재한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꾀하는 조각상에서는 무생물적인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인체의 굴곡과 근육의 묘사는 조각상의 뒤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팔을 감싸느라 솟아오르는 등 근육은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을 부여한다. 조각상은 정적 속에서 가장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며 하며 관람객을 매료시킨다.
경주, 부산, 제주를 거치며 2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는 세종문화회관에서 8월 31일까지 개최된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총괄하는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