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선택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며 산다.

 

학교에 가고, 직장을 다니고, 적당히 아파하고, 적당히 괜찮아지기를 반복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 삶을 사는 경우도 많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휘말려서, 혹은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서, 원하지 않은 일 앞에 놓일 때가 있다. 그럴 땐 억울하고, 벗어나고 싶고,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기분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일본의 만화가 키토 모히로가 2004년 연재를 시작한 만화 《우리들의》이다. 한국에서는 2005년부터 《지어스》라는 제목으로 정발되었고, 2021년 《우리들의》완전판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만화는 원치 않은 운명에 강제로 처해진 아이들의 심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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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거대한 로봇, 지구의 운명, 어린 조종사들이 등장하는 설정 때문에 단순한 SF물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화 한 화를 넘길수록, 이 작품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죽음을 앞둔 주인공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되짚고 작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룬다.

 

<우리들의>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 속에도 그들의 서사처럼 작고 빛나는 장면들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줄거리


 

주인공 15명은 모두 초등학생 및 중학생으로, 여름방학에 참여한 어촌 자연학교에서 자신을 ‘코코페리’라고 소개하는 수수께끼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코코페리는 아이들에게 재밌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겠냐고 제안하고 아이들은 컴퓨터게임으로 생각해 별 고민 없이 제안에 응한다. 그 게임의 정체는 500m의 기계를 타고 적과 싸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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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코코페리가 시범으로 첫 전투를 보여주고, 코코페리의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아이들은 숙소로 돌아간다. 다음날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비현실적인 상황에 얼떨떨해하는데, 곧 첫 번째 파일럿으로 지목된 와쿠 타카시라는 소년의 전투가 시작된다.

 

쾌활하고 진취적인 와쿠는 첫 전투를 무사히 끝내고, 다른 파일럿들과 함께 지어스의 밖으로 나가 승리감에 젖어 있다가 별안간 지어스 아래로 떨어져 사망하게 된다.

 

이렇게 밝혀지는 충격적인 사실은, 코코페리가 말한 게임은 컴퓨터 속 게임이 아닌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담보로 한 실제 전투상황이라는 것과 전투가 끝나면 그 파일럿은 죽음을 맞는다는 것.

 

지어스의 연료는 물질적 재료가 아니며, 파일럿의 생명력을 사용해서 움직인다.

 

전투에서의 승패과 무관하게 지어스가 움직이려면 파일럿의 생명력을 사용해야 하고, 그래서 전투가 끝나면 그 파일럿은 생명력이 다해 세상을 떠난다.

 

이 설정 자체로도 충분히 비극적인데, 작가 키토 모히로는 여기서 한술 더 뜬다.

 

15명의 파일럿은 차례로 한 명씩 15번의 전투에 임하고, 전투에서 이겨도 파일럿은 사망하는데, 그럼 전투에서 진다면 어떻게 될까? 지구가 멸망한다.

 

또 이 전투는 심지어 시간 제한도 있다. 48시간 안에 무조건 승부가 나야 하며, 전투를 시작한지 48시간이 넘어도 승부가 안 나면 양쪽 다 진 것으로 간주되어 세상은 멸망을 맞는다.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지구의 운명을 짊어지고 싸우게 되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싸운다. 하지만 전투에서 이겨서 지구가 멸망을 피해간다고 해도 파일럿 15명은 무조건 죽게 되어있다.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15번의 전투는 장소 랜덤, 시간 랜덤, 적군 랜덤이다. 한 번의 전투가 지나고 일주일 뒤에 다음 전투가 시작될지, 한 달 후에 시작될지, 심지어 바로 다음날 시작될지도 모른다.

 

만화 《우리들의》는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는 것 같은 비극적 상황을 마주한 인물들의 심리를 촘촘하게 따라간다.


 

 

15명의 중심인물, 개개인의 밀도 높은 서사 – 죽음 앞에 놓인 인물들의 자세


 

《우리들의》원작 만화는 죽음을 직면한 어린 소년·소녀들의 무력감, 공포심, 살고자 하는 욕망, 그리움 등의 심리를 정교하게 표현했기로 유명한 작품이다.

 

아이들은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갑작스레 직면하게 되고, 스스로의 견해, 인생관, 성격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파일럿들이 모두 침착하게 남은 삶을 정리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패닉에 빠지는 파일럿들도 있다.

 

15명의 아이들 중 가장 절망하고 두려워하는 파일럿은 코모다 타카미와 카코 아사오. 코모다는 파일럿들이 전투 후에 죽는다는 걸 알자마자 혼절하고, 카코는 다음 파일럿으로 지목당한 뒤 패닉에 빠져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고 악몽을 꾼다.

 

《우리들의》에는 메카닉 전투 장면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있는데, 《우리들의》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바로 '죽음 앞에 선 인간들의 심리'이다. 그래서 지어스의 파일럿들의 평소 생활이 어땠는지, 인생관은 어떤지, 가정환경은 어떤지가 계속해서 묘사된다.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순간이야말로 삶에 주목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파일럿 중 한 명인 코모다 타카미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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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다 타카미는 중학교 1학년의 유복하고 정숙한 소녀다. 아버지는 해군의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무뚝뚝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에 비해 비중이 작지만 딸을 사랑하고 아끼는 평범한 어머니다.


군인의 딸로 태어나 얌전하고 조용하게 자란 타카미는 조심성이 많고 겁도 많고, 친구도 없다.

 

코모다 타카미의 과거 회상에서 타카미는 어릴 때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이유로 학급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그 영향으로 현실 사회가 아닌 책과 독서에 깊게 빠지면서 사회와 단절된 모습으로 나온다.  그 뿐만 아니라 군인인 아버지에 비해 나약한 자신,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할 수 없는 자신에게 약간의 자기혐오도 가지고 있다.


피아노를 배우지만 그냥 배우는 것 뿐이고 피아노를 잘 치고 싶은 욕심도 없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코모다 타카미는 '자아가 없는' 소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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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타카미가 다음 파일럿으로 지목되고, 막중한 책임과 죽음의 예감을 피부로 느끼면서 자아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타카미는 처음으로 '자신과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느낌', '세계가 자신을 보듬어주고 있는 느낌' 즉 일종의 소속감을 갖게 된다. 책 속에서만 사회를 보고 책에서 간접 경험을 얻던  타카미가 현실로 나온 것이다.


자아와 소속감을 갖게 된 타카미는 자신이 살던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기 주변에 당연하게 있던 풍경들을 새롭게 보게 되고, 소중히 여기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독자는 타카미를, 그리고 자신의 삶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될 수밖에.

 

 


현실성과 비현실성의 공존 - SF적 전투상황, 그 가운데서 발생하는 민간인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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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가 여타 SF 만화, 전투 만화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현실과 비현실의 공존이다.


사실 《우리들의》의 기본 설정들은 너무나도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이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불분명한 500m의 전투로봇, 심지어 로봇의 연료는 인간의 생명, 또 원하는 대상을 순간이동 시킬 수 있는 능력, 전투에서 지면 지구멸망이라니.

 

이렇게 비현실성이 난무하는 작품이지만, 나는 《우리들의》에는 비현실성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존재감을 키우는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파일럿 아이들의 서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개개인의 서사와 그 태도들이 너무도 타당하고, 현실에 있을 법하다.

 

뿐만 아니라 지어스에는 정치, 군대 등의 사회가 등장한다.

 

지어스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즉 1권의 첫 전투에서부터 지어스의 존재는 '정체불명의 괴수'로서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일본은 '몰래 전투용 병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외세의 압박도 받게 된다. 그래서 일본은 자국의 군대를 투입해 지어스를 막아보려 하지만 현대 기술로는 지어스에 상처도 낼 수 없다.

 

게다가 그 괴수가 싸우면서 산을 통째로 없애버리기도 하고 마을을 깔아뭉개 버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본은 엄청난 재난 상황을 맞는다.

 

이 와중에 주인공 파일럿들은 아직 미성년자이고, 사안 자체가 워낙 심각하고 중대하기에 정부과 군대가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함께 전투를 진행한다.

 

사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민간인 희생자들의 등장이다. 내가 지금까지 본 히어로물, SF, 메카닉 전투물 등에는 민간인의 존재가 결여되어 있었다. 있더라도 비중이 약하거나 히어로들에게 도움받는 역할일 뿐, 작품 내에서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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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들의》는 전투의 희생자들을 끊임없이 조명한다.

 

희생자들의 생활 터전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파일럿들의 작은 판단 미스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지어스로 인해 가족을 잃고 남겨진 유족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가 작품 전반에 걸쳐 아주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한다.

 

아이들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싸우지만 지어스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적과 싸우는, 사람이 타고 있는 로봇'이라는 걸 민간인들이 알 리가 없다. 대중의 분노와 공포는 갈수록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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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히어로 액션 장르의 영화만 보더라도 파괴되는 건물이 몹시 많지만 그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들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 히어로가 지구를 지키려면 민간 피해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들 그런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한 번씩은 '저걸 다 어떻게 치우고 새로 짓냐'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는가?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재난 상황이 생긴다면, 유가족들이, 그리고 삶의 터전이 무너진 피해자들이 그저 가만히 앉아서 히어로들에게 고마워할 리가 없다.

 

작가 키토 모히로가 '히어로물에서 피해받는 민간인들과 그들의 남겨진 주변인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질문의 대답들을 엮어서 《우리들의》로 그려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렇게 《우리들의》는 비현실적 상황 속에서도 현실과 비슷한 모습들이 드러나는, 비현실성과 현실성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내가 느끼는 이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비극적 상황에서의 인간찬가적 스토리 - 그럼에도 인간의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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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찬가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인간의 발전가능성을 잊지 않고 인간의 삶을 예찬하는 장르적 특성이다.

 

나는 《우리들의》를 읽으면서 내내 삶을 예찬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의 독백과 입을 빌려 작가의 인생관과 가족관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우리들의》가 인간찬가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과 그 삶을 예찬하지만 이상적인 부분만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찬가 작품들의 특징은 '인간은 실수하고 서투르고 완벽하지 못한 존재지만 그렇기에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에 있는데, 《우리들의》의 경우는 그 '완벽하지 못한 점' 이 바로 생명의 필멸성이다.

 

지어스는 인간의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고 그 생명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데, 이것 자체로 인간의 영혼은 빛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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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려면 어둠이 있어야 하듯이, 죽음이 있기에 삶의 가치가 빛난다.

 

인간은 감정이 있기에 때때로 절망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기쁨과 행복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인간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입고 좌절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 점을 파일럿들의 태도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파일럿들 중에는 이기심, 과욕, 회피성 등등 이상적이지 못한 행동을 보이는 파일럿도 몇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의 삶에서는 소중한 주인공이라고 《우리들의》는 말한다.

 

실수투성이로 살다가 언젠가는 죽어버리는 인간의 삶을 다루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키토 모히로는 그 길을 선택했고, 그래서 《우리들의》에는 인류를 향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렇기에 《우리들의》에서 보여주는 파일럿들의 삶에 대한 태도, '그럼에도 생명은 빛나고, 살아있는 모두가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그래서 삶은 아름답다'는 메시지가 더 큰 울림을 준다.

  

*

 

《우리들의》는 냉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적인 감정과 선택들을 조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말한다.

 

완벽하지 않고, 자주 흔들리고, 때때로 이기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인간다운 인물들의 모습은, 이 작품이 단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결국 이 만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삶은 필멸성을 지녔기에 더 소중하며,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우리들의》는 어쩌면 이런 세계의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말을 가장 절실하게 건네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이 메시지를 모두가 잊지 않기를, 작별 인사를 나누는 그 날까지 삶을 사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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