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페터 슐레밀은 어떤 부유한 상인의 사교장에 나간다. 그날 회색 옷을 걸친 사나이가 페터 슐레밀에게 온갖 금화가 쏟아지는 주머니와 당신의 그림자를 바꾸자고 말한다. 슐레밀은 이를 수락하고, 금화 주머니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림자를 잃어버려 사람들에게 냉대당하고 소외되고 만다.
그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을 황금에 혹해서 팔아버렸다. 그로 인해 크나큰 고통과 슬픔을 겪는다. 그리하여 돈으로 거래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면, 돈에 눈이 간 페터의 욕망보다 그림자란 무엇인지, 그림자가 없는 페터 슐레밀은 왜 소외되었는지 그에 눈을 뗄 수가 없다. 누구나 갖고 있고, 이 세상에 형체를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갖고 있는, 심지어 사물조차 갖는 그 그림자가 없는 남자. 그림자를 팔아버린 사나이. 나는 그가 그림자를 팔아버린 순간 유령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는 그런 존재.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투명하지만 기필코 존재는 하는 것. 저승으로 넘어가지도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버리고만 미끄러진 존재. 존재와 부재 그 사이로 미끄러져버린 것.
연극 <유령>을 보자마자 이 이야기를 떠올렸던 것은 그 미끄러짐 때문이었다. 작중에서 유령 역할의 배우들은 자신의 개성을 가리는 천을 덧입고 바퀴가 달린 신발을 신고 무대를 가로지른다. 그 장난스러운 몸짓에 웃음이 터지다가도 그 미끄러짐에 씁쓸함을 느꼈다.
언어는 과연 모든 것을 재현할 수 있는가. 예술은 정말 소외된 자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가. 예술이 그들을 소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놉시스
극장에 배우들이 모여있다. 그들의 역할이 시작된다.
배명순은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 정순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신분을 감춘 채 찜질방과 식당을 떠돌며 삶의 가장자리에서 버티지만 세상은 배명순을 끝끝내 받아주지 않는다. 이름 없는 존재로, 그늘 아래 놓인 채 살아가던 배명순은 병을 얻고 가족도 신분도 확인되지 않은 채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죽음 이후, 배명순은 유령이 되어 무대 위로 다시 돌아온다. 자신처럼 지워지고 잊힌 이들과 함께, 세상이 외면한 현실을 하나씩 꺼내 보이며 우리가 보지 못했던 존재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휠리스를 탄 유령들
이 연극은 무연고자들의 삶을 조명하며 이 삶을 재현해내려고 하다가 문득 거부한다. 이 역할이 싫어, 이 연극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아? 라면서. 그렇게 연극이 필연적으로 담보하는 극적 약속은 어긋나고 만다. 그 어긋남 속에서 몰입은 깨지고, 당혹스러움 속에서 의문이 피어오른다. 무언가를 재현하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고, 결국 이는 그를 구원하고 위로할 수 있게 한다는 예술의 그 목적은 얼마나 기만적이고 오만할 수 있는지.
과거 사람들은 인간의 역할이 신이 부여한, 이미 주어져 있는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어학자 소쉬르는 세계가 먼저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를 재현하기 위해 언어를 사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 그래서 언어 구조 속에서 세계를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이미 구조 안에서, 어떤 문화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언어의 방식, 언어가 체계화하는 무의식적인 생각의 구조에서만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는 것으로는 그것의 실재를 이야기할 수 없다. 나무를 영어로는 'tree'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나무’라고 부르는 것처럼. 실제 의미와 그것을 지칭하는 표현의 결합은 자의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해라는 것은 완성되지 않는 것이므로, 계속 완결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 우리가 정말 상대를 이해했다고 해도 이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어에서 "이 영화 어때"라는 말을 두고,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는 의미인지,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는지’라는 의미인지는 맥락에 따라 갈린다. 이 필연적인 모호함, 결코 실재를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 없으므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차이. 그 차이를 재현하려고 예술가들은 애를 쓴다.
소외된 자들을, 무연고자들을, 그림자가 없는 자들을 정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들을 무대 위에 정말 올려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 작품은 극을 만들어가는 모두가 알고 있다. <유령>의 연출가는 말한다. “사람으로 났다면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처럼 죽어야 한다.” 도대체 사람이란 뭐길래. 삶이란 뭐길래. 사람처럼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왜 이들은 소외되고 미끄러졌는가. 누가 이들을 삶으로부터 미끄러트렸는가.
나는 이 역할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연기하고 싶지 않고, 나는 캐스팅에서 떨어졌지만 무대에 참여하고 싶고, 이 연극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고, 연극은 도대체 뭐이며, 삶은 뭐이고, 이들은 왜 이렇게 불행하게만 살다 불행하게 유령으로 남아서까지 지긋지긋한 이승을 떠도는지. 힐리스를 타고 무대를 가로지르고 누비는 배우들은 그렇게 미끄러지고 절대로 현실을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몸으로 연기로 이를 보여준다. 극 안의 이야기와 극 외부를 넘나들며, 연극의 규칙을 쉽게 허물고, 웃음을 통해 웃을 수 없는 삶들을 말하는 일이 얼마나 허상 같은지 말하며,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는 없음을 말한다.
이것은 한 편의 굿일까 연극일까?
연극은 끝이 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 연출가의 뜻에 따라 배우들은 엉망이 된 연극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유령들은 자신의 시체를 보고, 그 위에 기름을 뿌리는 것을 보며 정말로 세상과 작별한다. 담뱃불에 커튼이 타기 시작하면서 불이 번져 무연고자들의 처리되지 못한 시신들은 끝내 타오르게 된다. 무대 감독의 꽹과리 소리와 함께 시체들은 불에 타고, 유령들은 비로소 이승을 떠난다.
꽹과리 소리와 함께 불에 타면서 비로소 애도는 시작된다. 이 애도는 이제까지 소외된 인물들을 위로하며 한 편의 기이한 굿과 같은 연극을 마무리 짓는다. 연극은 일종의 무속 신앙 속 굿을 닮았다. 죽은 자, 소외된 자, 소리 내지 못하는 유령은 소외된 무당의 입을 빌어 말하고, 무당은 억울하게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한다. 배역은 배우의 입을 통해 목소리를 얻고, 자신의 삶을 무대 위에 재현하고 끝내 그 몸을 통해 모든 감정을 다시 토해내고 체험하면서 삶을 애도한다.
애도의 과정은 필요하다. 죽음 자신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유령들의 마음을 우리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그림자 없는 자들의 목소리
사회적 안전망의 결함으로 인해, 이들은 그림자조차 없는 유령이 되어버린다. 사물 취급조차 받지 못한다. 공평하게 모두의 발에 붙어있는 그 그림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이 정말 소외된 자들을 구할 수 있는가? 이 작품은 묻는다. 하지만 회의주의로 빠지지 않는다. 묵묵히 미끄러지고 피해 가며 간혹 약속과 규제와 부딪쳐가며 묻는다.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을까? 담을 수 있을까? 듣고 있을까? 분장을 지우면 내가 되고, 이들은 내가 되는 꿈을 한없이 꾸며, 인물과 배우 그사이를 넘나들며 기꺼이 절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한다.
함부로 말하지 않으나, 계속 말하려고 애쓰는 것, 동시에 함부로 말하는 것들을 경계하길 주문하는 것, 그리고 애도하는 것. 이 연극은 한 편의 굿이 되고,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배우와 배역을 넘나들며 발화되는 말, 모순되는 말들 속에서 미끄러지며 그 차이 속에서만 포착된다. 그래서 관객은 당혹스러움 속에서 다른 차원에서 발화되는 목소리를 느낀다. 유령들의, 그림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이 연극은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재현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말하려 한다. 말할 수 없기에 더욱 말해야만 하는 그 아이러니 속에서, ‘유령’들은 그림자 없이 미끄러지며 우리 곁을 스친다. 우리는 그 미끄러짐을 보고, 그 미끄러짐에 대해 끝내 말하려고 한다. 그것이 애도이며, 예술의 시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