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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끝비


 

성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밤 9시 40분이 넘을 무렵인 걸로 기억한다. 2시간이 살짝 넘는 시간 동안 여러 개의 물음표와 여지를 맞부닥치고 막 나온 참이다. 소형 초록색 우산을 팍- 펼쳐내어 짧은 샤프심들처럼 내려대는 얄궂은 비 사이 안으로 들어갔다. 통유리로 된 건물로 보폭 넓게 걸음 치는 옆모습이 보였다. 얼핏 스치는 얼굴 표정을 보니 마냥 신나 보이진 않는다. 어딘가 가라앉은 기운이 스스로도 느껴진다. 가끔 너무 좋은 공연을 보면 기분이 팍- 상한 사람처럼 표정이 굳고 할 말을 잃어버린다. 입으로 당장 어떤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쌓인 문장이 많고, 느낀 감정이 층층이 들춰내졌는데 공연이 종료됨으로써 마구 헤집어진 마음이 정리되지 못한 채 내 안에 갇혀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어젯밤에 그 비정돈을 어떻게든 정돈으로 뒤바꾼 채 잠이 들려고 했는데 새벽 1시에는 잠에 모든 시선이 뺏겨버렸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여전히 묵직함이 느껴진다. 담아 온 게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단단한 뭉텅이로 쇄골뼈 아래와 명치 위에 꽉 들어차 있는데 또 한 줄로 풀어내려니 꼭 시작에는 죽을 맛이다. 어제는 한강 작가의 책을 주제로 음악 작품(야나체크, 쇼스타코비치 등)을 감상하는 토크 콘서트에 다녀왔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을 다룬다는 것 자체로도 발바닥 위에 추 하나를 달아놓은 것 같은데, 거기에 실내악 음악까지 곁들이니 체감상 두터운 책 10권을 2시간 동안 압착해서 흡수하고 온 기분이다. 무언가가 빙빙- 왼팔과 오른팔을 지나 다리까지 채 내려오지도 못했는데, '머리'에 있는 것을 꺼내려니 벌써부터 힘이 든다. 이럴 땐 말미에 실연으로 감상했던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Pärt - Spiegel im Spiegel)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너덜너덜해졌을 때 들으면 좋다고 했다. 이 곡에 대해서 할 말이 정말 많지만 내가 은연중에 정해놓은 흐름 상 후반부에 위치하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되니 말을 아껴두겠다.

 

 

 

2. 첫숨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 아무래도 첫 번째 곡이었던 바흐를 들으며 입을 떼는 게 좋겠다. 내가 여태껏 경험해 본 공연은 가짓수가 몇 개 되지 않지만 보통 레퍼토리에 바흐가 하나라도 껴있다면 반드시 그 곡은 '시작'을 담당했다. 왜 바흐가 항상 서두를 담당하고 있는가? 이 궁금증에 대해서는 그의 곡이 클래식 레퍼토리에서 '기본 중의 기본'과 '본질'에 가깝고, 연주가의 역량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작곡가라서 그런가? 하고 나 홀로 추측하고 있다.


다행히 이날은 이동섭 진행자가 시작의 이유를 앞서 밝혀주었다. 이 곡은 한강 작가가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 시작 전 첼리스트 크리찬 라슨(Chrichan Larson)이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곡으로 토크 콘서트의 문을 여는 게 좋을 것 같아 선정했다고 전했다.


침묵으로 형성된 정적 속에서 바흐를 연주하고 있는 첼로의 본체를 바라보는 일은 퍽 즐겁다. 그러면서도 신기하다. 사실 말이 첼로지, 결국 나무가 아니던가? 탱탱하게 당겨진 현에 송진이 묻은 말꼬리가 스치고 손가락의 폭신한 부분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음을 낸다. 현악기 앞판에는 알파벳 f 모양의 구멍이 있는 것을 아시는가? 무대 아래에서 f구멍 사이로 조명이 쏟아지니 그 안쪽이 괜스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f 아래에는 분명 텅- 비어있을 텐데 어떻게 이 사이로, '진중'하다고 명명할 수 있는 소리가 나는 걸까?


순진한 물음이 자꾸만 떠오르니 눈을 팍 감아버렸다. 앞이 캄캄해지니 시끄러운 울림(잡생각)이 잠잠해진다. 다수가 약속한 침묵 속에 첼로 하나가 툭- 놓여 연주가의 숨소리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낮은 것이 오니 별생각도 안 든다. 차분하게,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멍하니 머문다. 오히려 이런 곡들은 내가 뭐라 판단하고 느끼려 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 안에서 내가 끼울 잔소리는 없다.


바흐를 다시금 되새기며 이날의 토크 콘서트를 떠올려보자. 한강 작가의 대표작들과 각 책마다 어울리는 곡들을 조합해서 관객에게 선사한 공연이었다. 어떤 책들이었나 나열해 보자.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흰』, 『소년이 온다』, 『빛과 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작가가 쓴 작품들의 줄거리를 가볍게 나누면서, 우리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작가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눠주었다. 내가 어제를 통해 알게 된 한강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키워드로 나열해 본다.


폭력, 두려움, 솔직함, 담담함, 빛, 온기, 손바닥, 생명, 7년, 과거와 현재, 물음 그리고 눈


한강 작가님을 떠올려보자. 마른 체형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계신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계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그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문장으로 형성되기 전 정리되지 않은 형체가 있겠다. 작가님의 책을 만약 한 권이라도 본 적 있거나 간접적으로 줄거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그분의 글은 상당히 노골적인 폭력이 사실적으로 만연하다. 최소 몇 년 전 독서 모임을 통해 『채식주의자』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에도 이미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에 단숨에 읽히는 재밌는 소설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채식을 한다는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과 인물. 가장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존재로부터 오는 못된 주먹질이 내 명치를 때려대는데, 너무 불편했지만 결국 마지막 장까지 다 읽어버렸다. 도저히 끊을 수 없는 흡입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결말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건, 척추뼈가 보일 만큼 마른 주인공의 뒷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린다는 사실이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추악한 장면을 그토록 담담하게 그려낸 게 한강 작가다.

 

 

 

3. 가장 못생긴 발


 

문득 일전에 유튜브로 봤던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피아니스트 러셸 셔먼이 또 한 명의 피아니스트 백혜선에게 레슨을 해주며 이런 말을 했다. “너무나 완벽한 연주지만, 다만 그게 문제다. 너무나도 정제되어 있다. 너의 제일 못생긴 발을 내밀어라. 너의 제일 못생긴 발을 내미는 게 네가 누구란 걸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못생긴 발을 내밀어라. 한강 작가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녀도 자신의 서툰 마음을 드러내며 글을 썼을 것이다.


소설가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끝에 다다랐을 때 소설의 막을 내릴 수 있으며, 그 물음에 답을 내리는 것은 독자라고 하였다. 작가가 책을 통해 다루고 있는 주제를 보면 모든 게 ‘끝’이 없다. 끝을 낼 수 없는 아픈 감정의 소용돌이가 넘치는 지점의 이야기들이 가득 녹아 있다. 그 모든 것을 다뤄내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들었을까, 하는 연민의 생각도 든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인지 이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하물며 소설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한 명과 또 한 명, 그리고 또 하나의 이방인을 태어나게 하는데, 모두 내가 말을 붙여줘야만 입을 연다. 그 모든 복잡성을 통제한 채 나의 가장 못생긴 발을 뻗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온기’를 나누기 위해서.


이동섭 진행자는 한강 작가의 책을 논하며 자신만의 견해를 나눴다. 작가가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내가 받아들인 메시지는 이러하다. “모든 인간은 얼음장같이 차가우면서도 아름답다. 어떻게 하면 이 얼음장(폭력, 두려움, 이기심)에 맞서 이 세상을 버텨낼 것인가? 결국 빛과 온기, 그리고 사랑이다. 끝끝내 하얀 것으로 덮일 거라면, 그 덮인 것에는 안온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 삶에서 아름다운 존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미적인 측면으로만 바라봤을 때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핸드폰 안이라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만 봐도 일단 나보다 잘난 사람이 전부다. 내가 동양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미적 기준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들이 온 세상에 널렸고, 그들은 항상 나보다는 앞선 단계, 나은 생각, 성실한 현재를 꿈꾼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화면 반대편의 내가 떠오른다. 사람은 결국 자신을 우선시하지 않는가? 내가 누군가보다 0.1이라도 아래에 있다고 판단되는 순간부터 자존감은 금이 간다. 그 금이 실제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는 치료법과 인간만의 통제력으로 그것이 가짜임을 확인한다. 스친 건 종이 한 장인데, 덮는 건 수천 장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토록 연약할까. 그 수천 장의 역할을 책 한 권이 해내기에 사람들이 문학을, 책을, 그리고 한강이라는 사람의 내면 이야기를 품 안에 두는 것 아닐까? 토크 콘서트를 보고 나서 소개받았던 책 중에 한 권 정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어느 시점에 읽어야 할지는 감이 안 온다. 워낙 끝에 물음표와 온점을 많이 남겨 놓는 작가의 책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시점이 아니라서 고민도 된다. 읽게 된다면 아마 『희랍어 시간』이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것 같다. 이동섭 진행자가 『희랍어 시간』을 이야기할 땐, 얼마 전 보았던 연극 <랑데부>가 떠올랐다. 손바닥과 손가락의 인사와 마주하지 않는 손바닥과 손바닥. 손이란 건 가장 당연한 신체 부위지만 가장 부끄러운 영역이기도 하다.


누군가와 손 하나 잡는 게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지만, 손끝 하나 닿는다고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홧홧해지거나 “그럴 일 없다”라고 확정 지을 수 있는 게 이 부분이다. 내가 내 왼손과 오른손을 부닥치는 것, 내가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는 것, 나와 오래 말을 나눈 사람과 손을 잡는 건 핸드폰을 집어들 듯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행위라지만, 조금이라도 결이 달라지면 손을 내뻗는 길목에서도 심장 언저리에서 말을 얹는다. 희안한 일이다.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 사람. 작별할 수 없는 사람의 사랑과 의지에 관한 이야기다. 차마 입에 얹기도 무겁고 내밀한 사랑임을 알기에 지금 이 문장을 내뱉는 것도 숭고스럽다. 나는 무엇과 작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동섭 진행자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끝인사를 남기지 못한 채 이별한 순간들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아직 나는 무엇과 이별해 보았는가? 나는 정말 너무나도 과분하게도 내게 진심으로 애정을 주는 사람들과 영영 만날 수 없는 이별을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떠남'이 주는 '먹먹함'이 내게는 아직 심장 아래에 박혀 있지 않았다. 체감이 되지 않고, 체감하고 싶지 않은 마음만 가득 떠다닌다.

 

 

 

4. 작별하지 못하는 것


 

나는 무엇과 작별하지 않으려 하는가? 일단 지금 현재의 나와 작별하고 싶지 않다. 근래에 이토록 모든 게 존재하고, 아무 일도 없고 근근이 행복하고, 소소히 슬퍼하고, 내일이 기대되며, 과거를 즐겁게 반추하던 오늘과 어제가 있었던가? 이 무미건조한 평범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잃고 싶지 않다. 또 하나는 내가 보는 장면들을 잊고 싶지 않다. 이 습관은 작년 11월부터 생겨난 건데, 이 기억하고자 하는 욕심이 여러 행위를 이끌었다. 이곳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쉽게 망각해버리는 나 자신을 어리석게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도통 일기를 쓰지 못했다. 늘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도, 매일 일상을 써야 하는 이유도 찾지도 못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보다 간단할 수 없다. 그날마다 재밌는 일, 슬펐던 일, 신기했던 일을 겪은 ‘나’를 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길게 한글로 타닥인 뒤 며칠 있다가 다시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이상하리만큼 낯설다. 일단 내가 내뱉은 게 맞긴 해서 익숙하긴 한데, 누가 말한 건지 모르겠다. 자아가 수십 개쯤 있는 것 같다. 오늘 쓴 글을 수십 년의 후에 다시 되돌아볼 수 있을까? 나는 먼 미래의 나와도 이별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또 나는 내 앞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 사람일 수도 있고, 지금은 ‘소리’일 수 있겠다. 소리를 피워내는 행위도 예쁘다. 음은 시간의 예술이다. 순간의 장면이다. 그림과 달리 녹화되지 않는 한, 매 순간은 곧 이별이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소리를 내는 예술가들을 접하게 되니, 그냥 120분 정도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어떤 공연을 봤고, 어떤 사람을 마주했는지, 내 시선 안에서 당신들은 어떤 울림을 냈는지, 이미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사람들은 누구인지 되돌아볼 수 있다.


클래식은 뒤돎의 예술이다. 모든 게 내 뒤에 있다. 뒤에서 앞으로 내밀어야 하는 포물선이다. 연주가는 까맣고 하얀 악보를 통해 되짚고, 관람객은 연주를 통해 과거를 마주한다. 옛것을 이렇게까지 반복해서 향유하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그냥 아름다워서? 그 아름답다는 게 도대체 뭐길래 이토록 얽매이는 걸까? 과거가 현재를 이렇게까지 뒤흔드는 데에는 어떤 까닭이 있는 걸까? 이 물음은 아직 내가 답하기엔 이른 질문인 것 같다. 조금만 유예를 두자. 어쩌면 평생 답을 내리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5. 끝결


 

이제 다시 이 글의 본질로 돌아가자. 소개받은 곡들이 있지 않은가. 기억이 남아나지 않기 전에 떠올려보자. 실내악단 화음(畵音)의 연주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첼로 모음곡 5번 중 1악장 ‘전주곡’

김진경 첼리스트가 의자에 앉는다. 침묵으로 형성된 정적 속에서 바흐를 연주하고 있는 첼로의 본체를 바라보는 일은 퍽 즐겁다. 그러면서도 신기하다. 사실 말이 첼로지, 나무가 아니던가? 탱탱하게 당겨진 현에 송진이 묻은 말꼬리가 스치고 손가락의 폭신한 부분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울림을 낸다. 현악기 앞판에는 알파벳 f 모양의 구멍이 있다. 무대 아래에서 f구멍 사이로 조명이 쏟아지니 그 안쪽이 괜스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 든다.


f 아래에는 분명 텅 비어 있을 텐데 어떻게 이 사이로, ‘진중’하다고 명명할 수 있는 음색이 나는 걸까? 순진한 물음이 자꾸만 떠오르니 눈을 팍 감아버렸다. 앞이 캄캄해지니 시끄러운 잡념들이 잠잠해진다. 다수가 약속한 침묵 속에 첼로 하나가 툭 놓여, 연주가의 숨소리 사이에서 터지는 낮은 결이 오니 별생각도 안 든다. 오히려 이런 곡들은 내가 뭐라 판단하고 느끼려 하지 말고, 멍- 해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 안에서 내가 끼울 잔소리는 없다.


레오시 야나체크 - 현악사중주 1번 ‘크로이체르 소나타’ 중 3, 4악장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얼기설기 뒤엉키면 이 3악장이 되지 않을까?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도 웃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무언가에 당장 집어삼켜질 것 같은데, 이미 신경과 근육의 기억은 낙인처럼 새겨져 있어 몸은 춤을 추고 손을 얹고 삐걱거린다. 스쳐가는 부드러운 선율은 가면이다. 숨겨져 있는 보라색 핏방울의 아우성이 있다.


그 목소리를 현악기 몇 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다. 실내악이란 도대체 뭘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파급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합이라는 게 이상할 정도다. 내게 야나체크는 대략 20분 정도의 소나타로만 인사한 작곡가였다. 그도 이런 현악 4중주 곡을 써냈구나. 이런 노래가 있었구나. 다른 건 몰라도 3악장은 꼭 들어보셨으면 좋겠다. 그냥… 일순간에 오는 공포감과 무력감이 곳곳에 내포되어 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현악사중주 8번 중 2, 3악장

진행자가 말하길,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작곡가의 클래식 음악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삶의 궤도가 비슷하지 않은가? 스탈린이라는 독재정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는 곡들이 많다. 그 안의 대표적인 인물이 이 쇼스타코비치겠다.


지금 곡 다시 들으려다 2악장을 반복해서 듣고 왔다. 중독성 미쳤다! 이 리드미컬하면서도 재지 하면서도 무한대(∞)를 활로 끊임없이 그려내는데, 나도 모르게 멍해지는 기분 어떡하냐고! 그러다가도 갑자기 둥당둥땅! 내질러버리는데 8자 모양으로… 알다가도 모르겠으면서 계속 앞으로 가는 게 딱 당신과 나의 인생살이 같다. 대충 정해놔도 엇갈리고, 되는 거 하나도 없는데, 일단 매일 하루는 반복되고, 얼레벌레 내질러버리는 행동들이 마구 가득한 하루가 아닌가? 쇼스타코비치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위트 있고 유쾌하게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다. 프로코피예프랑 뒤뚱거리는 건 똑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사람이란 정말 재밌다.


존 케이지 - 4분 33초

4분 33초의 마법이다. 연주자와 관객이 서로의 역할을 뒤집는 순간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무대이며, 저곳이 담아내는 관객석이다. 피아니스트는 고요히 책을 넘기고 뚜껑을 닫으며 연주자를 존중한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연주의 영역에서 발을 뺀 채, 들려오는 것을 들어낸다. 바스락거리는 음, 누군가의 숨결, 종이가 사각 하며 넘어간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파열음, 진동… 한 번도 고요했던 적이 없다. 이어지는 연주다. 쇼스타코비치에서 잔뜩 흔들렸던 마음을 이 곡의 서두에서 한 번 정리한다. (울기 싫었는데 살짝 울었다)


아르보 패르트 - 거울 속의 거울

이날의 공연을 대표할 수 있는 곡은 이 곡이 아니었나 싶다. 2중주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대화라고 했다. 『거울 속의 거울』에서는 두 사람이 대화한다기보다는, 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조용히 마주하는 느낌이 더 강하다. 내면의 흐름을 아주 나지막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감각이다.피아노가 어찌나 다정할 수 있는지 놀랍다. 점으로 된 밑줄을 그어 오선지를 그리는 건반 위로 바이올린이 첫 음을 낸다. 아주 얇고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길. 발을 뗀 것을 아는지 피아노의 왼손이 ‘쿵’ 하고 반응한다. 이 길이 맞다고, 괜찮다고, 손을 마주 잡아준다.


아까 마주했던 하나의 손바닥과 하나의 손가락이 떠오른다. 아름다우면서도 폭력성을 내재한 흰 ‘눈’이 내려오는 장면일 수도 있고, 나체로 누운 몸 위에 꽃이 피어나는 순간의 뒷모습일 수도 있겠다. “제 동생이 더 이상 모독되지 않게 해달라”는 동호 형의 말을 듣고 난 뒤 남겨지는 발걸음일 수도 있다. 내 세상에선 어떤 길목이던가. 아마도 ‘빛을 따라가라’는 조용한 길잡이였을 것이다.


무대 위엔 늘 누군가를 비추는 조명이 있다. 그 하얗고 은은한 빛이 너무도 예뻐서 자주 시선을 머물게 된다. 그 빛을 머금은 사물들을 천천히 따라가 본다. 둥글게 튀어나온 피아노 뚜껑의 모서리엔 세 가닥의 빛선이 얇게 흐르고, 바이올린의 나무 몸체는 연주자의 팔 위에서 은은히 움직일 때마다 빛을 작게 반사한다. 활에도 빛이 있다. 고동색의 스틱이 위아래로 수직으로 움직일 때마다 빛은 가운데로 모였다가 흩어진다. 활 끝의 은색 스크류가 이따금 반짝인다.


왼쪽 아래로 시선을 더 내리면, 진행자의 간이 테이블 아래 투명한 생수통 하나가 보인다. 물은 반쯤 비어 있지만, 그 안에 일렁이는 빛이 있다. 하얗고 투명한 것에서 은은한 결이 나온다. 포말만 같다. 무대를 더 넓게 바라보면 조명은 공간 전체를 비추고 있지만, 그 안에도 그늘은 있다. 내 발 앞치에 일자로 그어진 검은 그림자. 회색을 닮은 은빛이 넓게 깔려 있다. 연주자에게선 어떤 빛이 나올까? 소리로 말할 수 있겠다. 아주 천천히 그려내는 활, 그리고 두드려지는 건반. 피아니스트 김보경의 손가락 마디로 서로 다른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짚어낸다. 바이올리니스트 피예나는 어두운 길목의 가로등 같다. 다리를 땅 위에 단정히 세우고, 조급하지 않게 현 위를 오고 간다. 그 자체가 광원의 역할이다.


자연물을 가장 닮은 장르가 바로 이 장르라고 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붙잡아내는 것, 그게 악기고 연주자들이다. 있었으나 몰랐던 것들이 빛과 온기로 눈앞에 놓이니 마음이 이상해진다. 만약 모든 태초의 기원이 있었다면, 이 곡의 흐름 안에서 그것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목가적인 느낌을 넘어선 평온함이 있다. 통제력을 잃어버린 당신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진다면, 반드시 이 곡을 들어야 한다.


배동진 - 구릉, 주름이 되어 (화음 프로젝트 Op.181)

실낱보다 더 얇고 사람의 목소리와 닮은 지점의 표현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여기서 알았다. 산간의 추위와 능선의 고즈넉함 속에서 펼쳐지는 적막, 그 속에서 피어나는 구릉의 형상이다. 아... 고요하다. 진짜 소리를 듣고 싶으면 현대 쪽으로 가까운 곡을 선택해야 한다. 저 악기가 어디까지 풍경을 묘사하고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이쪽에 조금 더 개방적으로 열려 있다. 이래서 악기 연주자들이 현대음악을 많이 좋아하는 걸까?

 

 

 

6. 끝내며


 

이봐. 얼마나 많은 마음이 길게 담겼는지. 글을 쓴다는 건 정말 긴 시간을 잡아먹는 길인 것 같다. 이 일기장을 쓰는 데도 2시간은 걸린 것 같다. 아마 종이 위에 써야만 했다면 휘갈긴 글씨체에 알아보지 못한 부분이 절반 이상일 것이다. 그래서 책도 클래식도 결국 ‘교양’이라 불리는 걸까. 대중음악을 듣고 여기까지 주절거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가능하겠지만… 나로서는 당분간 이쪽에만 마음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 얼른 7월이 오면 좋겠으면서도 벌써 6월 중순인 게 웃기다. 시간의 흐름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쩌겠나, 매일 이렇게 쌓이는 마음이나 길게 붙잡아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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