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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근래 사람에 대한 강렬한 악의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가령 지하철에서 가방이나 어깨를 세게 밀고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볼 때나 모욕적인 언사를 들을 때 그렇다. 그런 맘이 머리를 내미는 빈도가 점점 잦아진다. 그럴 때면 부정적인 감정에 푹 잠겨버리고 싶은 한편,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이런 악한 마음이 나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다. 감정이 조금 가라앉으면 마음이 울적해졌고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로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마음 깊은 곳에서도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않는 사람은 대체 어느 정도의 그릇을 가진 것인지, 그것은 평생의 미스테리일 것이다. 살면서 정말 드물게 만나는 무던하고 짜증 내는 법 없는 사람들을 볼 때면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자꾸 상상해보려 한다. 어떤 상황이 와도 화내는 법 없는 사람들을 보며 그건 과연 태도일지 본질일지 실례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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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감정까지 억누를 필요가 있을까? 반대로 행동에 악의가 옮지 않는다면 감정에 면죄부를 주어도 될까?

 

악의가 샐까봐 두려워서 밤을 지새운 적도 있다. 억누르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스스로 질책했을 때 속으로 말대꾸하는 걸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는 애먼 데서 욱하게 될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약 반 년간 이에 대한 고민을 이어 오면서 나름대로 내린 처방은 바로 '절충'이었다. 그건 감정이 생기는 것 자체는 막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이 악의를 배출하기 위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취미를 찾은 것이다.

 

 

 

분노도 혼내지 않고 안아주세요


 

부정적인 감정 중에서도 폭력적인 감정을 이해하고 보듬기 위해선 우선 마인드 세팅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첫 번째로 악의를 갖는 게 단순히 도덕성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려고 애썼다. 결국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내적 동기가 아니라 태도다. 두 번째로는 악의는 감정에 의해 촉발된 욕망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다는 걸 주지하려 했다. 악의를 한 번 가진 일로 하루아침에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끝으로 악의 자체가 아니라 악의의 원인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걸 의식하려 노력했다.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이 만나 화학 반응을 일으켜 분노를 느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마인드 세팅의 요지는 결국 나 자신을 심하게 힐난하지 않는 데 있다. 사실 나 자신이 품은 악의에 놀라 하루를 망치는 일이 너무나도 피로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죄책감을 덜어내는 게 훨씬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음가짐을 바꾸고 나니 그동안 가졌던 감정의 실체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요컨대 분노라는 감정에 계속 수치를 주는 건 분노를 가라앉히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더 속상한 맘이 들게 하는 건 오히려 악의 그 자체가 아니라 분노를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의 다른 부분에 있다는 걸 차차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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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터는 불현듯 타오르는 화를 마주해도 웬만해선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지만, 그것만으로는 영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택한 게 소설을 직접 쓰고 읽는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소설보다는 토막 토막 떠오르는 소설의 장면들만 쓰는 것에 가깝다. 소설 자체보다는 장면과 내용에 대한 아이디어를 쓰는 것이다. 핵심은 화를 가라앉히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화를 전부 덜어내는 데 있다. 캐릭터를 설정하고 줄거리를 쓰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쉽고 빠르게 쓸 수 있는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분노의 원인이 된 사람을 철저한 악인으로, 혹은 그에 버금가는 빌런으로 그려내고 나는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장르는 판타지든, 막장 드라마든, 법정물이든, 뭐든 좋다. 주인공이 고초를 겪은 경위는 지인이나 조력자 등의 입을 빌려 악인의 죄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빠르게 카타르시스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에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다 묘사할 순 없기 때문이다. 우매한 악인은 죄를 부정하지만, 주인공의 편에 선 공명정대한 심판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장르와 관계 없이 클리셰를 잔뜩 집어넣은 권선징악 스토리를 그려내고 나면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은 좀 나아진다.

 

사실 이러한 소설보다 좀 더 쉽게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스토리가 있다. 조심스레 고백하자면, 이렇게 당당하게 승리하는 주인공을 보는 것보다는 빌런이 고통을 겪는 과정을 묘사하는 편이 경험상 훨씬 큰 카타르시스를 줬다. 이 소설의 경우 주인공은 종적이 이미 묘연해진 상태이거나 악인과 더는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는다. 둘 사이에 있는 사연은 악인이 고통받는 과정에서 회상으로 하나 둘씩 떠오른다. 악인은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후회하지만, 주인공과의 사이에 있던 우정과 신뢰를 잃은지 오래다.

 

묘하지만 이런 스토리가 스트레스의 원인을 아예 제거해버리는 스토리보다 더 기분을 쉽게 나아지게 해주었다. 누군가는 정신 승리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정신 승리만으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한가.

 

이렇게 소설을 써두면 저장해두었다가 비슷한 일이 있을 때 꺼내 읽을 수 있다. 맥락에 따라 내용을 조금씩 고치거나 보충하기도 하면서, 감정의 실체와 분노했던 정황을 정리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이따금씩 주인공이 부끄러운 존재가 되기도 해서 스스로 반성한 적도 있다. 이 경우에는 정당하게 화날 만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는 걸 주인공의 상황을 설명하는 서술자의 빈약한 논리를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주인공이 나 자신이지만, 나 자신과는 또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반성도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간단한 것처럼 말했어도 사실 악의를 다스리는 건 아직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감정은 파도처럼 어디로, 어떤 모양으로 튈지 알 수가 없는데 부정적인 감정으로 날뛰는 와중에 배의 방향타를 잡으면 쉽게 울 것 같은 심정이 된다. 정말 내가 이 감정의 주인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을 정도다.

 

애석하지만, 당연하게도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이해하고 제대로 보듬어줄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특히 폭력성을 동반하는 감정이 들 때는 감정을 억지로 정당화하고 비난으로부터 방어하려 드는 게 아니라 감정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억누르지 않고 천천히 이 감정을 소화시켜 내보내는 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자신만의 방법을 모두 한 번쯤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결국 마음에 영혼을 둔 존재이므로 마음에 잡아먹히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평생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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