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왔다는 듯, 낮은 길어지고, 공기는 후끈해졌다. 햇빛은 어김없이 강렬해졌고, 피부에 닿는 바람조차 묘하게 끈적이다.
이맘때가 되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한동안 제자리에 머물렀던 몸과 마음에 쌓인 열기를 식히듯,눈앞의 풍경을 단숨에 바꿔 줄 무언가가 간절해진다.
여름은 그런 계절이다. 일상은 그대로인데도, 낯선 곳의 냄새나, 새로운 언어, 이국적인 거리의 색감 같은 것이 문득 그리워진다.
하지만 정작 ‘왜 떠나고 싶은지’,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지’를깊이 생각해 본 적은 드물었다.
그래서 올여름,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알랭 드 보통의 『나를 채우는 여행의 기술』을 다시 펼쳐 들었다. 왜 나는 여행을 꿈꾸는지를 묻기 위해. 그리고 그 물음은 자연스럽게 나의 여행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 여행을 해왔고, 그때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는가.
이상적인 여행지를 고르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여행지를 고른다는 것은 단순히 지명을 정하고 항공권을 예매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진단하고, 내 삶에서 결핍된 무언가를 찾는 과정에 가깝다.
어쩌면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장소는, 우리가 갖지 못한 것들, 우리 삶에 비어 있는 것들이 형상화된 공간일지 모른다. 그러니 여행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오히려 ‘회복’을 위한 시도이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사색의 시간이다.
내가 어느 여행지에 끌리는 이유, 어떤 풍경 앞에서 오래 머무는지 곱씹어보면 그 안엔 늘 지금의 내가 아닌, 내가 되고자 하는 나가 서 있다. 고요하고 안정된 삶을 갈망한다면 우리는 자연을 향하고, 자극과 변화에 목마르다면 낯선 도시로 향한다. 그리하여 여행지는 우리에게 일시적 환상이 아니라 삶의 어떤 가능성을 시험해보는 실험실이 된다.
이국적이라는 감정은 사실 우리의 삶에 없는 것을 비추는 거울이다. 낯선 언어, 생경한 풍경, 다른 리듬의 하루. 이 모든 것은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에 설레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고를 때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나에게 이국적이라는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그 질문 끝에는 늘 지금의 나와, 내가 바라는 삶의 형태가 겹쳐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 안정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떠난다 해도, 끝끝내 내 안의 불안을 놓지 못한다면 그 여행은 절반의 해방일 뿐이다.
여행은 우리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는 동시에, 그동안 피했던 자기 자신과 재회하게 만든다. “여행을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을 데려가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책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든 결국 ‘나’와 함께다. 그렇기에 여행을 떠나기 전, 또는 떠난 후에도 반복적으로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여행을 떠나는가?”
“나는 이 여행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가?”
이 질문들은 목적지를 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그 여행의 밀도를 결정하는 핵심이 된다.
나는 한때 여행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름난 관광지, 평점 높은 맛집, 놓치면 후회할 전시회와 박물관들. 일정표를 빼곡히 채우는 여행이 뿌듯함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물론 그 방식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기억에 오래 남는 장면은 오히려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나를 깊이 사로잡았던 순간들은, 생각보다 작고 사소한 장면들이었다. 편의점에서 낯선 포장을 뒤적이며 신기한 간식을 고르던 순간, 마트 진열대에서 처음 보는 물건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간, 아무 목적 없이 골목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이름 없는 빵집의 온기.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나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 작은 일상들은 ‘나’라는 감각을 조금씩 재조립해 주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진짜 여행을 원했던 이유는, 낯선 곳에서 나를 새롭게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산책이 주는 위로가 있다. 고민으로 가득한 머리를 이끌고 무작정 걷다 보면, 생각이 줄고 감각이 살아난다. 방어적이던 마음도 서서히 풀린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 사람들, 날씨—그 모든 것이 현재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그러는 동안 무거운 주제들, 예를 들면 인생의 목표나 진로 같은 것들이 더는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여행도 산책과 비슷하다. 목적지는 있지만 길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때로는 그 변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산책이 생각의 근육을 풀어주는 것처럼, 여행은 삶의 결을 다시 만져보게 한다. 감정을 털어내고, 부끄러움도 내려놓고, 가끔은 어리숙하게 길을 헤매는 것조차 괜찮아진다.
그래서 나는 가이드가 이끄는 패키지 여행보다, 약간은 불편하고 즉흥적인 자유여행을 선호한다.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순간부터 설렘은 시작된다. 어떤 도시로 갈지, 무엇을 할지 계획하는 시간마저 여행의 일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여행을 거듭할수록 관광지보단 마치 현지인 처럼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바라보고 싶다. 마치 그곳의 일상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처럼.
그래서 나는 공항을 좋아한다. 공항은 세상의 수많은 출발점과 도착점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 캐리어를 끌고 걷는다. 그들을 바라보며 상상한다.
저 사람은 어디로 가는 중일까,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출국장으로 향하는 길, 비행기를 타기 전의 복잡한 절차들조차 나에겐 설레는 의식 같다. 그 과정을 통과하며 마음도 함께 준비된다. 비행기에 올라,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문득, 이 모든 걱정과 불안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책에서 행복을 얻기 위한 첫 조건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충만함이라고 언급된다. 그리고 여행은 그 충만함을 회복하는 과정이자, 스스로를 다시 정렬하는 시간이다.
결국, 좋은 여행이란 자기 자신과 진지하게 소통하는 경험이다.
무엇을 위해 떠나는가, 무엇을 느끼고 싶은가.
내가 이 여정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얻고 싶은가.
평범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찾으려는 노력. 그것이 여행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 여행의 시작점은 언제나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