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원죄(原罪)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원죄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죄를 뜻한다. 기독교 교리에선 뱀의 간교한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인 선악과를 먹으며 원죄가 탄생했다고 설명한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지은 첫 번째 죄로 인해, 인간 본성에 결함이 생기며 세상엔 고통과 죽음이 나타났단 것이다.
죄를 물려받은 인간은 고통 속에 살면서도 행복과 구원을 갈망한다. 그 구원은 신, 혹은 인간이더라도 신에 가까운 완전무결한 존재만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완전한 형태의 구원을 받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내게로 와 나의 음악이 되리라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1910년에 출간됐다. 파리 오페라 극장, 일그러진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채 극장 안 자신의 왕국에 사는 ‘음악의 천사’ 유령은 아름답고 재능 있는 크리스틴을 사랑한다. 끔찍한 얼굴에서 비롯된 콤플렉스와 불행을 가면으로 감춘 유령은 크리스틴에게 집착하고,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진심 어린 동정과 입맞춤을 받게 된 유령은 결국 집착도, 증오도 버린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음악으로 만든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되며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같은 소설 원작으로 제작된 뮤지컬 <팬텀>은 한국에선 2015년에 초연됐다. 뮤지컬 <팬텀>은 팬텀의 얼굴과 마음이 왜 그렇게 상처투성이인지, 그는 왜 극장 지하에 살 수밖에 없는지 슬픔의 기원을 깊이 파고드는 작품이다.
무시무시한 팬텀의 가면, 예술적 프라이드란 갑옷으로 무장한 마에스트로, 가면 속 에릭의 연약한 맨얼굴, 벨라도바와 똑같은 크리스틴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팬텀의 지하 무덤은 요람이기도 하단 걸 알 수 있다. 오래전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돈나이자 에릭의 어머니였던 벨라도바는 세상에서 도망친 후, 극장 지하에서 몰래 그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에릭이 물려받은, 평생을 짊어진 원죄(原罪)이다.
뮤지컬 <팬텀>은 2015년 초연, 2016~2017년 재연, 2018~2019년 삼연, 2021년 사연을 거쳐 2025년 오연으로 돌아왔다. 10주년 <팬텀>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5월 31일에 개막했으며 8월 11일까지 공연된다. 팬텀 역엔 박효신, 카이, 전동석, 크리스틴 역엔 이지혜, 송은혜, 장혜린, 카리에르 역엔 민영기, 홍경수, 카를로타 역은 리사, 전수미, 윤사봉, 필립 드 샹동 역은 박시원, 임정모, 숄레 역엔 문성혁, 벨라도바 역엔 김주원, 황혜민, 최예원, 젊은 카리에르 역은 정영재, 김희현, 김태석, 어린 에릭 역엔 문선우, 조이든, 조우준이 캐스팅됐다.
아서 코핏 극작, 모리 예스톤 작곡 <팬텀>은 뮤지컬·오페라·발레를 결합한 종합예술 작품이다. 2015년 한국 초연에선 한국 프로덕션을 위한 곡들을 추가해 캐릭터성과 서사, 음악적 다양성을 더했다. 팬텀의 ‘내 비극적인 이야기’, ‘이렇게 그대 그의 품에’, 필립 드 샹동의 ‘그대를 찾아내리라’(오연에서 삭제됐다), 크리스틴의 ‘그의 얼굴을’(재연에서 삭제됐다)이 추가됐다. 2025년 오연, 그랜드 피날레 시즌에선 일부 넘버를 축약해 진행에 속도감을 더했다.
아베 마리아 기도해 주오, 아베 마리아 도우소서
발레 비중이 큰 것도 한국 프로덕션의 특징이다. 2막에선 에릭의 어머니 벨라도바와 젊은 카리에르의 이야기가 파드되(2인무)로 시각화됐다. 에릭은 어떻게 태어났으며, 그의 얼굴은 어쩌다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는 왜 극장 지하에 갇혀 유령처럼 살아야 하는지. 모든 이유는 아름다운 발레와 크리스틴의 아리아, 카리에르의 대사로 드러난다. 벨라도바 역은 발레리나가 연기하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는 크리스틴이 대신한다. 절대적인 사랑을 주던 어머니와 똑같은 목소리를 지닌 크리스틴을 팬텀이 사랑할 수밖에 없단 걸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외모와 따뜻한 성품, 천재성을 타고난 크리스틴은 가수를 꿈꾼다. 그 길은 녹록지 않지만, 크리스틴은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파리 오페라 극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카를로타의 실종된 의상 담당자 조셉 부케의 자리를 대신하는 크리스틴은 노래를 부르고, 재능은 팬텀에게 발견된다. 그녀를 프리마돈나로 키우기 위해 노래를 가르치는 마에스트로, 팬텀의 가면 속 두 눈은 오직 크리스틴만이 볼 수 있다.
세상에 알려진 첫 번째 레이어는 팬텀, 즉 극장에 사는 무서운 유령이란 정체성이다. 크리스틴만이 볼 수 있는 두 번째 레이어는 마에스트로(Maestro : 거장 지휘자·음악 선생 등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어머니 벨라도바만 사랑으로 품어줬던, 세상은 물론 크리스틴에게만큼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에릭의 가장 연약한 세 번째 레이어는 일그러진 얼굴이다.
카리에르에게 에릭의 사연을 들은 크리스틴은 자신이 그를 구원할 수도 있겠단 순진한 신념에 사로잡힌다. 가면을 벗고 얼굴을 보여 달란 크리스틴의 간청은 에릭에겐 유혹이자 두려움이다. 에릭은 ‘난 얼굴이 없다’, ‘비가 올 것 같다’는 논리에 안 맞는 대답으로 회피한다. 극장 지하는 하늘도, 햇빛도, 구름도 없이 천장으로 막혔기 때문에 비는 오지 않는다. 에릭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크리스틴이란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가면을 벗는다.
그의 심연까지 사랑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크리스틴의 순진한 얼굴은, 바다 괴물을 본 것처럼 공포에 물든다. 벨라도바의 목소리로 에릭에게 손 내밀던 그녀는, 똑같은 음성으로 비명을 지르며 지하 세계에서 도망친다. 지상으로 올라간 크리스틴은 바로 잘못을 뉘우치지만, 에릭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이것이 순진함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크리스틴의 죄다.
깊이 묻어줘요, 아무도 못 찾게
열여덟 살, 극장 관리 감독 견습생이었던 카리에르는 전도유망한 벨라도바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랑은 세상엔 나와선 안 됐다. 자연스레 에릭 또한 드러나선 안 되는 아이가 됐다. 에릭이 짊어진 원죄(原罪), 크리스틴의 순진함이 저지른 죄, 벨라도바가 자기 뜻과 상관없이 죄를 짓고 신께 용서를 빈 것까지. 모든 죄의 시작과 불행의 원인은 카리에르였다.
나약한 카리에르와는 달리, 벨라도바는 에릭의 흉측한 얼굴을 똑바로 보며 사랑했다. 절대적인 사랑만을 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에릭은 슬픔에 잠겨 어둠에서 죽은 듯 살아간다. 그에게 주어진 기쁨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 오페라 극장에서 들려오는 음악, 또한 크리스틴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그녀의 존재 자체였다.
카리에르로부터 시작된 원죄는 벨라도바를 거쳐 에릭에게 대물림됐다. 어둠에서 태어난 에릭은 크리스틴이란 빛을 만나 구원을 열망한다. 하지만 그도 자신과 크리스틴을 지키려 살인을 저질렀다. 억울하게 고통을 물려받았지만 자신도 죄인인 에릭은, 크리스틴의 섣부른 순진함에서 파생된 죄로 불행에 빠진다. 돌고 도는 죄의 순환 구조는 카리에르에 의해 끊긴다. 이기적이지만 책임지며 살던 입체적인 성격의 카리에르는 슬픔 앞에서 아이처럼 흐느낀다.
빛을 지키기 위한 어둠의 여정, 음악으로 구원받는 삶
5월 31일 오후 7시 30분,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공연의 팬텀은 카이였다. 그는 <팬텀> 다섯 시즌 중 재연을 제외한 전 시즌에 참여하며 최다 출연을 기록했다. 2015년 <팬텀> 초연으로 대극장 뮤지컬 첫 주연을 맡은 카이는 그 후 <벤허>, <프랑켄슈타인>, <베토벤> 등 많은 대극장 뮤지컬 무대에서 굵직한 대표작들을 만들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한세대학교 공연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카이는, 뮤지컬 외에도 월드 투어
2008년 팝페라 가수로서 무대 활동을 시작한 카이는, 뮤지컬 배우로서는 소극장 주연과 대극장 조연을 거쳐 2015년 <팬텀> 초연 주인공에 이름을 올렸다. 5월 31일 공연 무대인사에서 그가 한 말처럼, <팬텀>은 카이에게 무대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사건’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주인공으로서 작품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다는 실력을 증명해 냈으며, 그로 인해 대극장 뮤지컬에서 여러 대작의 주연을 연기하고 노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예고 음악과 수석 졸업, 서울대 성악과 학사·석사·박사 수료, 현재도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카이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클래식 엘리트 코스를 거쳐 팝페라 가수로 데뷔하고, 대극장 뮤지컬 주연배우가 된 그의 행보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이력이 전부가 아니다.
17년간 부딪치고 깨지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은 카이는 커리어 및 예술성, 즉 예술이 추구해야 할 본질인 아름다움의 확장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그동안의 여정은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 관객에게 바치기 위한 고독하고 지난한 수행이었다. 카이는 <팬텀> 무대에 10년간 서온 경험치·내공·실력이란 토양에 노래란 꽃을 피워내 관객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서려 한다. 자신의 고향인 무대를 치열하게 지켜내는 그의 모습은 큰 울림을 줄 것이다. 크리스틴을 지키기 위해 어두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팬텀을 보며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엔딩에선 네 사람만이 무대에 남는다. 팬텀, 크리스틴, 카리에르, 필립 드 샹동. 재능이 지나치게 뛰어나 시기와 질투를 받은 크리스틴은 데뷔 무대를 마치지 못했다. 그녀에게 또 다른 무대가 주어질진 알 수 없다. 필립 드 샹동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크리스틴의 마음이 누굴 향해 있는지 보게 된다. 돌아갈 수 없는 애틋한 추억에 빠져 살던 카리에르는, 자신에서부터 시작된 원죄로 인해 비밀을 들킨다. 그는 평생 지켜온 평판과 손에 쥔 것들을 잃을 것이며, 소중한 이도 떠나보냈다. 구원을 받는 건 팬텀, 즉 에릭뿐일지도 모른다.
에릭의 얼굴을 거부했던 크리스틴은, 그의 얼굴을 두 번째로 봤을 땐 눈물과 입맞춤으로 속죄하며 사랑을 고백한다. 성공한 삶을 살던 카리에르는 오랫동안 숨기던 비밀을 스스로 드러내고, 소중한 사람을 잃으며 ‘부끄럽게 살아남은 자’가 돼 평생 속죄하며 살 것이다. 원죄의 고리가 그렇게나마 일부 끊어졌단 점에선 완전한 비극은 아니다.
콤플렉스와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을 끌어안고 살다 보면 상처에 스스로 찔려 고통받기도 한다. 그러한 것들은 ‘슬픔’이란 한 단어에 담아낼 수 있다. <팬텀>은 그 슬픔을 에릭의 인생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에릭이란 어둠은 고통을 뚫고 크리스틴이란 빛에 다다르며 구원받는다. 그 여정을 보고 있으면 진한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에릭처럼 가면 속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