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블스 플랜 벽바둑에 홀려버렸다, 왕초보의 우당탕탕 바둑 도전기
솔직히 고백하자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둑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마치 고고한 학처럼 선택받은 소수의 두뇌만이 즐기는 심오하고 어려운 게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달까.
그랬던 내가 요즘 바둑에 푹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니,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데블스 플랜’에 등장한 ‘벽바둑’이었다. 화면 속 플레이어들이 벽을 세우고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기존 바둑에 비해 벽바둑은 훨씬 직관적이고 명쾌하게 다가왔다. 일단 규칙 자체가 복잡하지 않고 공평하다고 느껴졌다. 여러 명이 동시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데블스 플랜’에서는 세 명이 게임을 시작해 한 명이 먼저 살아남고, 이후 남은 두 명이 다시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는 두 명이 작정하고 한 명을 공격해 탈락시키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벽’이라는 명확한 장치가 존재했기에, 어디에 어떻게 ‘집’을 지어야 하는지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바둑의 실체가 조금이나마 드러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금단의 영역, 바둑에 발을 들이다
벽바둑을 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진짜 바둑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어? 그럼 나도 한번 배워볼까? 못할 것도 없지 않나?’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무작정 바둑 어플 '바둑팝'을 설치하고 보니 결국 바둑도 ‘집을 짓는다’는 개념이 핵심인 것 같았다.
마침 시험 기간이었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원래 시험 기간에는 벽지 무늬조차 재미있어지는 법이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학교생활이나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들 속에서 일종의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내 전공이나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롯이 즐거움만을 위한 취미.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일로 발전시키는 삶을 살아왔다. 소설을 너무 좋아했지만, 어느새 공부의 대상, 분석의 대상이 되어버리니 순수하게 즐기며 읽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바둑은 달랐다. 내가 백날 천날 노력한다고 프로 바둑기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될 생각도 없다. 그래서 바둑이야말로 온전히 ‘취미’로만 남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비슷한 예로 발레하는 것도 참 좋아했지만, 학원에 가기까지 준비물도 많고 오가는 데 하루를 다 써야 해서 바쁠 때는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바둑은 ‘바둑팝’이라는 어플 하나면 충분했다. 잠깐씩 켜서 한두 판 둘 수 있고, 게임 중간에 잠시 멈춰도 되니 시간 조절이 훨씬 용이했다. 바쁜 일상 속 한 줄기 빛과 같았다.
AI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느끼는 좌절, 그리고 한 줄기 희망
물론 바둑 규칙은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특히 ‘사활’ 규칙은 경우의 수도 너무 많고, 어떻게 해야 내 돌이 살아나갈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솔직히 아직 집을 정확히 세는 방법도 모른다. 가끔은 너무 슬프다. 왜 대학교에 바둑학과가 따로 있는지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다.
그래서 ‘바둑팝’ AI와 대국을 둘 때면, 아무리 ‘초심자’ 수준에 맞춰져 있다고 해도 AI가 나를 그저 갖고 노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AI는 이미 모든 길을 알고 있는데, 나는 어차피 질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알파고 이후로 바둑은 이미 인간이 AI를 이길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현타'가 오고 만다.
결국 ‘내가 정말 규칙을 모르는구나, 기본적인 패턴조차 모르는구나’ 싶어서 어린이 바둑책을 샀다. 그래, 나는 바둑계에서는 어린이가 맞으니까! 초심자니까! 어린이 바둑책을 사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쉽고 재미있게 설명된 어린이용 책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전문 서적이었다면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규칙은 몰라도, 그래서 더 재미있는 바둑의 세계
그래서 진짜 결론은, 앞서 말했듯 규칙도 제대로 모르고 매번 지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설픈 수로 상대방의 돌을 따냈을 때의 그 짜릿함, 조금씩이나마 내 영역이 넓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의 그 뿌듯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비록 아직은 아홉 줄 바둑판 위에서 허우적대는 병아리 신세지만, 한 수 한 수에 담긴 무궁무진한 변화와 그 속에서 발견하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기에, 오늘도 나는 기꺼이 바둑판 앞에 앉는다.
이 작은 바둑판 위에서 나는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환호하며,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바둑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탐험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란다.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