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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본 기고문은 김아영 작가가 공식적으로 작품에 관해 언급한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으나, 작품에 대한 일부 해석은 에디터 개인의 의견임을 미리 밝힙니다.


지난 2월 28일부터 다가오는 7월 20일까지, 베를린의 현대미술관 함부르크 반홉(Hamburger bahnhof)에서 김아영 작가의 전시 “Many Worlds Over”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2022년 작가가 갤러리 현대의 “문법과 마법” 전시에서 발표한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와 호주영상박물관센터(Australian Centre for Moving Image)가 제작을 지원한 차기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를 함께 선보인다.


해당 작품은 호주 멜버른의 호주영상박물관센터에서 처음 소개된 후, 한국의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과 일본의 모리 미술관에서도 전시되었다. 이전 작품 “딜리버리 댄서의 구”를 매우 인상깊게 보았기에 신작인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를 꼭 보고 싶었으나 개인적 사정으로 한국에서의 전시를 놓쳐 함부르크 반홉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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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반홉에서 구매한 “Many Worlds Over”의 도록.

출처: 직접 촬영




딜리버리 댄서의 세계관에 빠져보자


 

김아영 작가는 “딜리버리 댄서의 구”로 저명한 국제 미디어아트 어워드인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최고상인 “골든 니카상”을 수상했고, 차기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를 통해 국립아시아 문화의 전당에서 지난 해 처음 시행한 “ACC 미래상”과 LG 그룹과 구겐하임이 파트너십의 일환으로 신설한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다.


다양한 언론과 미디어가 이러한 작가의 업적을 보도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딜리버리 댄서의 세계관을 알고 있을 것이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와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에른스트 모(Ernst Mo)”라는 여성은 미래의 서울에서 “댄스 마스터”라는 배달앱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배달 노동자다. 지속적으로 우수한 성과를 달성한 라이더들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고스트 댄서”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데, 이들은 빛의 속도로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으며 보수 또한 상당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른스트 모는 그녀와 똑 닮은 도플갱어 “앤 스톰(En Storm)”*을 마주치게 되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고스트 댄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고스트 댄서의 지위를 잃을 위기에 마주하며 앤 스톰과의 갈등이 깊어진 에른스트 모는 결국 그녀를 죽이고 만다. 앤 스톰은 죽기 전 다른 시공간에서 그들이 다시 만날 것을 암시한다. 여기까지가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내용이다.

 

이후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로 세계관이 확장되며 이들은 다시 만난다. 에른스트 모는 서로 다른 분기점의 시간선들이 그녀가 존재하는 시간선에 미치는 영향을 돌려놓는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녀는 댄스마스터 앱의 감시를 피해 시간이 원래대로 작동하도록 돕는 과정에서 다른 시간선의 앤 스톰을 만나게 된다. 앤 스톰은 이전부터 시간선을 조율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둘은 수많은 다중의 세계에서 적이나 동료로 마주한다.


그러던 중, 그들의 존재가 성가셨던 다른 시간선의 관리자(time keeper)**가 앤 스톰을 제거하기 위해 나타났고, 앤 스톰은 추격전에 휘말린 에른스트 모를 지키는 과정에서 희생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다른 시공간에서 끊임없이 다시 만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엿본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이 마주한 수 많은 세계의 이야기다.

 

*Ernst Mo와 En Storm은 같은 철자를 뒤바꾼 이름이다. Monster라는 단어에서 철자를 가져왔다.

**작품에서는 “주시간”이라고 불린다.




세계관에 등장하는 다중의 시간선과 비선형적 시간관


 

딜리버리 댄서는 흥미로운 기승전결과 시간과 다중세계에 대한 복잡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김아영 작가는 토마스 푹스(Thomas Fuchs)와 짐 밀러(Jim Miller)가 제시한 비선형적 시간관에 기반하여 딜리버리 댄서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푹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진보하기 위해 선형적으로 흐르는 자원으로 여겨지지만, 인간의 신체는 미래를 향한 일방적 경험이 아닌 순환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생체 리듬, 욕구, 기억의 재현 등 모든 경험이 작동과 회복의 반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에게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들은 인간의 순환적 신체와 자본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진보주의적 시간관 사이의 불균형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밀러 또한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을 분석하며 근대 이후 형성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신화를 비판한다. 그의 시간관에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가 공존한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붕괴는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드러내지만, 그 속에서 나타나는 불확실성과 변동 가능성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하는 희망의 단서로 기능한다. 즉, 그에게 시간이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지향하는 단일의 미래로 향하는 것이 아닌 변화와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개념이다.


푹스와 밀러의 선형적 시간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관을 고치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시간관이란 인간의 삶을 어떻게 구성하고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인식론적 기초가 된다. 따라서 선형적 시간에 대한 비판의 목적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형성해 온 남성 중심적 사회와 시장 논리에 기반한 지배층과 피지배계층의 구조를 전복하는 데에 있다.


김아영 작가는 작품에서 이러한 시간관을 다양한 방식으로 암시한다. 동료이자 적으로 만나며 다양한 결말을 맞이하는 수많은 시간선의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의 이야기로 비선형적 시간이 지닌 변화가능성을 보여준다. 전면에 드러난 긱 경제***에 대한 비판, 여성 퀴어 서사, AI의 발전이 불러온 예측 불가능성으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형성한 전통적인 사회적 권위를 전복하고자 한다.


***Gig economy. 사회에 정규직보다 계약직 및 프리랜서 등 임시직 고용 형태가 증가하는 경제 상황을 의미하며, 특히 온라인 플랫폼에서 운영되는 배송, 드라이브 서비스 노동산업을 일컫을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다.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의 짙어진 관계성


 

“Many Worlds Over”는 구작과 신작들을 함께 전시하여 김아영 작가의 세계관을 관객들이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등장인물들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퀴어적 요소, 한국 웹툰이 제공하는 자유로운 서사, 사회정치적 이슈를 반영하는 스토리텔링, 자본주의적 시간성에 대한 비판, 그리고 AI와 기술이 만들어 낸 수많은 가상세계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이번 신작에서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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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과 마법”에서 전시되었던 고스트 댄서 B(2022) 조형물. “Many Worlds Over”에서도 감상할 수 있었다. 

출처: 직접 촬영

 

 

특히 신작에서는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의 관계성에 대한 서사가 강화되었다. 이는 전시의 공간 구성에서부터 나타났다. “Many Worlds Over”는 관람객들이 서로 다른 두 갈래의 방향으로 나뉘는 전시 공간들을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었는데, 두 관람 동선의 종착지에는 신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가 있었다. 서로 다른 세계를 누비던 두 도플갱어 여성이 마침내 마주하는 상황을 관람 동선으로 재현한 것이다.


전시의 메인인 영상작업 또한 3면의 화면으로 구성되어 에른스트 모의 시각과 앤 스톰의 시각이 가운데 화면에서 마주하며 둘의 시공간이 합쳐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외에도 전시 공간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거울과 관람객들이 마주 보며 앉아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을 조작할 수 있도록 배치한 게임 시뮬레이션 작품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도플갱어를 마주한 감각을 다방면으로 재현하고자 한 의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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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마스터 시뮬레이션(2022). 약 12분 간 게임의 형식으로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을 조작하여 배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생각보다 조작이 어려웠다. 

출처: 직접 촬영

 

 

이들의 관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가 한국의 서브컬쳐인 GL**** 웹툰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이 이전보다 강조된 것도 인상적이었다.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은 무수히 많은 세계에서 마주친다. 그들은 때로는 서로를 죽이면서도, 때로는 서로를 위해 희생한다. 이 반복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애증은 짙어진다. 김아영 작가는 이러한 둘의 관계를 GL 웹툰의 혐관***** 서사에서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2년 전 2023 프리즈 런던에서 김아영 작가가 GL 웹툰작가 1172와 함께 작업한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2022) 월페이퍼가 “딜리버리 댄서의 구”와 함께 그녀의 Artist-to-Artist****** 부스에 전시되었을 당시, 해당 작품은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퀴어 서사를 확장한다는 언급 뿐 그 원천이 된 한국의 GL 웹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 “Many worlds Over”에서는 GL 웹툰이 김아영 작가가 전시 공간에 여성 동성애자 서사를 도입하는 데 영향을 미쳤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다. 함께 발행된 전시 도록에서도 작가가 인상 깊게 본 GL 웹툰들의 일부 장면과 그녀가 생각하는 웹툰과 웹소설 특유의 자유로운 스토리 텔링에 관한 인터뷰가 구체적으로 수록되었다. GL 웹툰이 김아영의 작품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이 강조되며, 딜리버리 댄서 시리즈는 여성 퀴어 서사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동시대 서브컬쳐 문화가 지닌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적 상징 또한 내포한다.


****Girls’ Love의 줄임말로 여성 동성애자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장르를 의미한다. 주로 서브컬쳐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다.

*****혐오와 관심이 복합된 관계라는 뜻. 마찬가지로 서브컬쳐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다.

******동시대의 영향력있는 미술계 거장들에게 미래의 예술계를 이끌 작가들의 지목을 요청한 후 지목받은 작가들의 작품을 별도로 전시하는 솔로 부스로, 일반 갤러리 부스와는 구별되는 공간이었다. 김아영 작가는 양혜규 작가의 지목을 받아 전시를 진행했다.

 

 

 

지속되는 동시대 사회의 반영


 

김아영 작가는 딜리버리 댄서 연작을 통해 동시대 사회정치적 이슈에도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번 작품에는 기술이 범람하여 급변하는 동시대 사회를 작품에 반영하고자 CGI(Computer-generated imagery)와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했다.******* 대부분의 장면이 배우들의 촬영본으로 구성된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연출이다.


이 생성형 이미지들은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을 방해하는 주시간, 타임 키퍼가 등장할 때마다 화면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전환되는 연출로 활용되었다. 작중에서 timekeeper는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을 위협하는 존재로, 이러한 화면 전환은 AI를 연상시켜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위협과 불확실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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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 장면의 일부. 배우들이 등장하는 화면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전환되었다. 

출처: 직접 촬영

 

 

특히 작가는 AI가 수많은 가상세계를 생산하여 동시대의 비선형적 시간관을 강화한다고 여긴다. CGI를 통해 만든 가상의 캐릭터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실제 인물들의 얼굴을 활용한 영상 콘텐츠들은 쉴새없이 생산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작은 전자기기 하나로 접하고 있다. 이러한 AI의 발전과 활용은 새로운 산업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반면, 딥페이크와 가상 인격을 통한 혐오 표현 등으로 사회적 문제를 낳기도 한다.


푹스와 밀러는 시간이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기초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미 AI가 창조한 수많은 가상 세계를 경험하며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시간선에서 탈피했다. 그리고 각각의 세계는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면서도 기존의 지배 구조를 새로운 양상으로 지속하며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말 그대로 “Many Worlds Over”인 것이다.


*******정확히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Many Worlds Over”의 도록 인터뷰를 참고하면 여러 프로그램을 함께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논의되는 인간성의 문제


 

딜리버리 댄서 연작은 스토리 텔링으로 여성 퀴어 서사와 동시대 사회정치적 이슈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의 다양한 해석의 층위가 인간성의 문제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에른스트 모와 앤 스톰은 서로 다른 여성으로서 “혐관”이라는 관계성과 여성 퀴어 서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둘은 단순히 서로 다른 여성이 아닌 도플갱어적 존재로, 앤 스톰은 에른스트 모의 또 다른 인격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서로의 몸짓을 따라하거나 똑같이 생긴 두 여성이 동작을 반복하는 듯한 몸싸움 장면이 이를 암시한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 앤 스톰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에른스트 모가 상실해가고 있는 인간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고스트 댄서”의 지위가 에른스트 모를 자본주의의 극한으로 몰아간다면, 앤 스톰은 자본주의적 시간으로부터 그녀를 인간의 순환적 시간으로 데려오는 존재였기에,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에른스트 모가 고스트 댄서의 지위를 상실했던 것이다. 신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에서도 타임 키퍼에게 앤 스톰이 희생당하는 장면은 AI와 기술이 기존의 자본주의적 시간관에도 변화를 불러오는 동시에 또다른 인간성 위협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앤 스톰을 에른스트 모의 인간성으로 바라보는 이러한 해석은 죽음을 맞이하고 둘의 재회를 암시하는 앤 스톰의 대사를 통해 디스토피아(실패한 자본주의 신화)에도 새로운 희망(지배적 시간관을 탈피한 유토피아)이 있다고 여기는 밀러의 시간관과도 연결된다.


비선형적 시간, 여성 퀴어와 자본주의적 지배구조 비판을 통한 권위의 전복, AI와 스토리 텔링. 김아영 작가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다층의 서사는 우리가 현재를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논의에서 출발한다.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의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전시가 지난 2월을 기점으로 종료되었기에 현재 국내에서는 김아영 작가의 딜리버리 댄서 연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 (Plot, Blop, Plop)”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다. 해당 전시는 6월 13일까지 진행된다. 지난 해 딜리버리 댄서 연작을 통해 김아영의 스토리텔링에 매료되었다면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신작도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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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정진형
김아영 작가님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기간 관련하여 정정사항 있어 댓글 남깁니다. 6/13> 6/1일까지입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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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1 10:11:4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