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2일 예술기획 파홀로가 주관, 웨스턴성악협회 주최로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 열린 <웨스턴성악협회 창단연주회>를 관람했다. 웨스턴성악협회는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영혼을 담는 예술'이라는 모토 아래 다양한 성악인들이 모여 함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제공함과 더불어 정기적인 연주 활동을 통해 클래식의 대중화와 지역사회 공헌을 목적으로 하는 음악협회이다.
이번 <웨스턴성악협회 창단연주회> 프로그램은 총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소프라노에 김영미, 박현주, 최윤정, 안정아, 이정아, 테너에 김충희, 이정원, 베이스에 김요한, 이형욱, 피아노에 최윤정, 김민정, 이미정의 출연으로 각 성악가들과 연주자들의 기량을 충분히 선보일 수 무대가 주어졌다. 1부에서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성악가들의 유려한 재해석으로 탄생한 한국 가곡을 통해 클래식에 익숙치 않은 관객까지도 조금은 긴장을 완화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가 펼쳐졌고 , 2부에서는 정통 성악만의 언어가 줄 수 있는 감동과 몰입감이 객석을 가득 채운 Opera, Zarzuela Arias(오페라, 사르수엘라 아리아)가 진행되었다.
클래식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가 흔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미 영화나 광고 등에 수없이 삽입되었고, 다양한 방식의 편곡으로 여러 매체에서 연주되었던 클래식 음악에 퍽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클래식의 고전적이고 규범적인 성격은 오늘날 대체로 난해함과 비일상성으로 여겨지고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전히 클래식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 지속적인 공연과 활동을 통해 클래식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하는 음악인들의 노력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숨쉬고 있다. <웨스턴성악협회 창단연주회>는 어떤 지점에서 그와 같은 음악을, 음악 속에 담긴 영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을까.
"무대 안에서 바라보기"
과거 같은 장소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공연되었던 <앙상블블랭크 - 작곡가는 살아있다>가 공연의 기획 취지로 역설하였듯이 현재에도 클래식 음악은 많은 현존 작곡가들에 의해 시대적 흐름과 새로운 음악사조를 반영한 다수의 창작품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클래식은 감상자로부터 멀어지는 음악이 되었을까?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학문적 중요성은 차치하더라도 과거와 달리 음악의 장르와 그 정의가 굉장히 다변화된 현재에도 클래식만큼 끊임없이 편곡과 변주를 거쳐 재해석되고,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선을 만들고 지키는 장르는 드물다. 클래식이 감상자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과 새로운 음악사조의 정신없는 움직임 탓에 우리의 시야가 가려지고 좁아졌을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클래식이란 시대의 흐름에도 끝내 불변하는 가치(혹은 그와 유사한 무언가) 하나만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옹호하게 만들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붙잡은 채 시간의 흔적을 느리게 더듬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클래식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가? 혹은 그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통용되는 클래식의 의미가 반드시 클래식 음악이 시대를 불문하고 음악의 영혼을 전달하는 감동의 매개로 취급되는 것에 대해 가지는 적절한 관련성은 언제나 당연한 것인가?
예컨대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대마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역사가 다름 아닌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모든 세대는 그 세대에 고유한 관심사를 매개로 과거와의 새로운 대화를 시도하여 새 역사를 써내야 한다는 뜻이다. (...)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옙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클래식이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가 될 수 있다면 그 이유 역시 모든 세대에 알맞는 관심사를 매개로 작곡가와 연주자 간의, 연주자와 청중 간의 대화가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한편 클래식이라는 용어 자체가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기는 하지만 클래식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적어도 작품의 창작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새로운 것이다. 20세기 현대음악의 거장 중 한 명인 올리비에 메시앙은 그의 고유한 기법인 '조옮김 제한 선법'으로 대표되는 탈전통적인 음악적 성향으로 유명하고, 그 역시도 처음부터 클래식은 아니었다. 올리비에 메시앙에 대해 김경주 시인은 그의 시 <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예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단의 저항과 동감, 희박함과 조밀함, 소리와 침묵, 혼란과 명료로 요약된 <그리스도의 승천>이라는 곡으로 박절에 대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내게 클래식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승천>을 들을 때 소리와 침묵을 동시에 들을 수 있듯이, 무겁게 가라앉는 음정들로부터 압도되어 일종의 저항과 동감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되듯이.
따라서 클래식이란 분명 변하지 않는 가치로 감상자에게 감동을 준다. <웨스턴성악협회 창단연주회>의 프로그램 중 2부에서 W. A. Mozart의 "Solche hergelauf'ne Laffen" 혹은 G. Puccini의 "Un bel di vedremo" 등의 곡들은 바로 그러한 소리와 침묵의 공존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특히 이형욱 성악가의 성악은 "Solche hergelauf'ne Laffen"은 여러 측면에서 내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성악가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이 하나의 뮤지컬을 연상시킨 것은 물론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표현한 방식 역시 기억에 남았다. 공연이 끝난 후 개인적으로 해당 곡의 여러 버전들을 들어보며 각각을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대체로 분노를 적극적으로 분출하기보다는 오히려 절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 반면 이형욱 성악가의 해석은 절정으로 폭발하는 분노를 그대로 담아낸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이 모차르트가 자신의 연인에 대한 상황을 투영한 작품이며 가장 모차르트다운 오페라로 평가되는 점을 고려할 때 내게는 후자의 해석이 더욱 진솔한 감정선에 놓여있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성악은 강한 발성으로 인해 소리에 집중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여겨지곤 하지만, 실은 소리의 행간 사이에 의도적인 pause를 삽입하거나 자연스러운 호흡의 공백이 발생함으로써 침묵이 음악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1부를 한국 가곡들만으로 구성한 까닭은 비단 관객들로 하여금 친숙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기 위함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통해 관객들과의 대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느껴졌다. 관객들은 '저 성악가와 연주자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같은 노래를 도대체 몇 번이나 부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노래를 불러도 매번 달라지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이 없이 무한히 복제되어 재생산되는 음악은 진실성을 잃는다. 소음이 된다. 더는 매혹적이지도, 이례적이지도 않다."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에 대한 김유진 작가의 위의 말에서 뻗어나와, 클래식은 가장 대화에 가까운 음악이 된다.
"무대 밖에서 바라보기"
웨스턴성악협회는 정통 성악을 바탕으로 '정통성과 창의성', '적극적인 연주활동', '연주자이자 연구가'를 지향하며 대중에게 클래식 음악을 널리 알리고 더 나아가 음악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자 창단되었다. 현재 국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음악협회로부터 웨스턴성악협회가 갖는 차별성은 무엇일까?
현재 웨스턴성악협회 이사와 사무국장을 역임 중인 이형욱 교수에 의하면 우선 다른 음악협회의 경우 창단연주회를 이토록 성황리에 만든 역사가 없고 성악인들의 창조적 예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세미나와 신인 성악인 육성을 위한 영아티스트 기획 등이 웨스턴성악협회만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다. 또한 주로 유럽 음악에 국한된 협회들과는 달리 러시아, 미국 등의 세계 각지의 음악을 아우르고자 하며 웨스턴이라는 용어 자체가 음악에 대한 모든 장르를 포괄하는 것이다.
정통적인 성악 음악 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활용하는 여러 장르들과의 협업, 예컨대 오늘날 뮤지컬에 대한 수요가 높은 만큼 뮤지컬 배우들과의 협업을 기획하고자 하는 계획 또한 준비 중에 있으며 이것이 개방성과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대중에게 음악으로 다가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장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앞서 언급했던 새로운 번역, 새로운 대화가 진정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지브리페스티벌> 역시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클래식 음악과 결합하여 새롭게 재해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밀한 편곡 과정을 거쳐 클래식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다는 점에서 같은 층위의 맥락에 놓여있다.
그러니까 클래식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불변하는 것들에서만 클래식의 가치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뿌리를 잃고 무분별하게 변주되는 음악을 클래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리고 그 경계를 분명히 하고 클래식을 클래식답게 지켜내는 역할은 오로지 음악인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수동성이다. 청각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음악을 듣는 이는 어떤 순간에라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나의 문을 열고 나가게 된다.
"Yet all experience is an arch wherethro'
Gleams that untravell'd world whose margin fades
For ever and forever when I move."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Ulysses"의 한 구절은 그것이 곧 한 인간이 삶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오디세우스적 태도이기에 자연스레 음악에 대한 감상자의 태도 역시 환유한다. 경험이 문이라는 것은, 문을 열고 나가면 또다른 경험, 또다른 세계, 또다른 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는 하나의 경험은 반드시 다른 경험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경험의 확장성이 곧 비가역적인 인간 조건임을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구조에서 경험은 문이고, 문은 영원히 멀어지는 세계라는 도식이 성립되고 이 흐름은 단발적인 사건과 경험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정신의 추동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클래식이라는 문을 열고 나갈 때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는 너무나 많은 문들에 의해, 좀처렁 닿지 않는 세계의 가장자리로 인해 클래식은 멀게만 보인다. 그러나 내가 과거 <오페라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 내한 공연을 관람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음악에 저항할 수 없는 까닭에, 음악이 인간과 가장 닮아있는 예술로서 우리에게 가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까닭에, 음악은 체험된다. 음악의 체험을 기다리며 문 앞에 서있는 당신, 음악 역시 당신을 기다린다.
웨스턴성악협회는 2025년 8월 22일에 로데아트센터 서초동 콘서트홀에서 열릴 영아티스트들의 무대를 준비 중이고, 10월 10일에는 제 3회 정기연주회가 예정되어 있다. 클래식이 멀게만 느껴지는 오늘날, 이처럼 소중한 기회들을 통해 문을 열고 나가 클래식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