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유스 포스터.jpg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는 여러 명의 장정이 얼음을 자르고 나르는 오프닝 시퀀스로 스크린 너머 차가운 숨을 뱉으며 시작한다. 덥고 습한 싱가포르에서 태어나고 자라 차가운 계절을 영화의 배경으로 삼고 싶었다는 감독 안소니 첸의 의도가 뚜렷이 보이는 부분이다. 두꺼운 얼음을 힘차게 자르고 옮기는 활기찬 오프닝 시퀀스가 지나가면 얼음처럼 경직된 청춘을 보내고 있는 '나나', '샤오', '하오펑'의 모습이 등장한다.

 

셋의 과거와 꿈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언급되기는 하지만, 영화는 그들이 느꼈을 상처를 훤히 들춰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연출은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셋과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하고 그들의 솔직하지 못한 부분을 존중하는 태도에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살얼음을 걷고 있는 것처럼 <브레이킹 아이스>는 조심스럽게 셋의 서사를 풀어낸다.

 

 

 

함께하기보다 한 발자국 나아가기를 택하는 용기


 

4.JPG

 

 

<브레이킹 아이스>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나나, 샤오, 하오펑이 함께 있을 때 즐겁지만, 불안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쓸쓸함을 두른 채 각자의 자리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모습은 셋이 함께 웃는 모습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셋의 첫 만남에는 어떤 목적도 없었다. 그저 나나가 핸드폰을 잃어버린 하오펑이 눈에 밟혀 샤오에게 그를 소개한 것이 계기였다. 나나와 샤오는 샌님처럼 보이는 하오펑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셋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다. 권태롭고 미래는 보장되지 않은 현재, 셋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일탈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들이 품고 있는 내면의 우울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을 감추지 않기 때문에 셋은 서로를 거울처럼 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6.jpg

 

 

영화에서 나나와 샤오, 하오펑은 젊지만 현재의 삶이 미래까지 쭉 이어진다고 여기거나 미래를 그리는 일에 체념한 듯하다. 나나는 피겨를 그만두게 된 이유를 반복적으로 반추하며 쉽게 우울에 빠진다. 샤오는 절도 혐의로 수배서가 전국에 돌고 있지만, 차라리 공안에 잡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당당히 얼굴을 내보이며 한 번 더 물건을 훔친다. 하오펑은 상담 치료에 제시간에 오라는 연락을 받아도 연락을 무시하며 자살 충동을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마치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버린, 부동(不動)의 현실이 불변하는 것과 같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중국과 한국의 문화가 어우러져 독특한 양상의 문화를 지닌 연길이라는 영화의 공간적 배경에서 짐작할 수 있듯 기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으로, 어떤 존재로 살아갈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정체된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게 한다. 사실 그러한 결정 과정에서 느끼는 혼란과 현재가 미래까지 같은 모습으로 연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느껴지는 절망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8.jpg

 

 

연길에서 오랜 시간을 산 나나와 샤오가 하오펑을 데리고 연길 관광을 다니지만, 사실 둘 중에서도 연길 출신은 없다는 점은 이러한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다. 과거와 현재가 같은 줄기로 이어져 있지 않듯이 현재의 상태도 미래까지 같은 모습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오펑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연길에서 보냈던 나나와 샤오는 그런 상상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막 연길에 온 이방인 하오펑의 존재는 두 사람이 자신들이 연길에 처음 왔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하오펑을 통해 나나와 샤오는 어떤 의미로든 다시 시작하기 위해 찾은 장소의 의미를 생각한다.

 

하오펑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는 아마 직장의 일로 상하이로 돌아가야 하는 듯하지만, 친구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찾은 연길에 계속 머무른다. 정해진 길을 따라 삶을 살아왔던 그가 저지르는 일탈은 영화 초반 상담사의 전화를 거절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받은 뒤 잘못 걸었다고 대꾸한 뒤 끊는 데 그치는 듯했다. 나나와 샤오를 만나고 내내 감정을 억누르던 하오펑은 흐느껴 울기도 하고 자신의 호텔 방에서 샤오가 흡연을 하는 와중에 까무룩 잠에 들기도 하는 등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슬픔은 같은 슬픔으로 위로받을 수 있기에 셋은 서로를 적극적으로 위로하려 들지 않고 하오펑은 그것을 통해 오히려 위로를 얻는다. 서로의 상태를 고치려 들거나 이상이 있는 것처럼 여기지 않고 그들은 그저 비슷한 외로움을 끌어 안은 채 서로 부대낀다. 이렇게 얼음과 얼음 사이에도 마찰열이 발생하고 얼어붙은 서로를 녹인다.

 

 

7.jpg

 

 

흔히 미디어 내에서 청춘을 그리는 방법 중 가장 흔하고 관객에게 쉽게 소구되는 씬이 아니라 침묵한 채 서로의 감정을 읽어내는 이러한 <브레이킹 아이스>의 연출은 잔잔한 감동으로 차갑게 스민다.

 

영화 내에서 이들이 화풀이처럼 행하는, 영화 내 청춘을 그릴 때 등장하는 음주, 섹스, 절도와 같은 행위는 이들이 마주하는 눈앞의 현실에 대한 스트레스가 폭발하는 순간이다. 궁극적으로 이들의 성장은 이런 충동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자신 안에서 꺼지지 않는 미련을 더듬어 가며 다시 찾아가는 여정에서 이들은 자신을 두른 얼음의 껍질을 벗고 얼어붙은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함께하는 순간의 즐거움이 아니라 자신을 상처 줄 수도 있는 곳으로 다시 걸어들어가는 그들의 선택 앞에 아쉬움보다 기쁨이 앞섰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이 서로의 존재로서 완전해질 수는 없어도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것이 못내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컬쳐리스트태그_서예은.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