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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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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그때 경황없이 만 원 빌려 갔던 아가씨입니다. 십 년도 더 된 일이라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시간이 많이 흘렀죠? 많은 게 바뀌기도 했고요. 그런데도 슈퍼에서의 추억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그대로네요. 좋은 건 마음에 계속 남나 봐요. 조금은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때의 죄송함과 감사함을 전하는 게 맞지 않나 해서요. 저를 모르셔도 상관없지만 언젠가 한번쯤은 얘기하고 싶었어요.

 

아마 여름에서 가을로 막 넘어갈 때였을 거예요. 제가 지각을 했던 날이라 일단 택시를 타야 그나마 빠듯하게라도 학교에 도착하겠더라고요. 급하게 나오느라 지갑도 못 챙겼어요. 가방에는 집 열쇠만 달랑 들어 있었고요. 택시비가 만 원 정도 나오는 꽤 긴 거리였어서 더 늦어질까 봐 초조했어요. 만원만원거리면서 일단 정류장까지는 내려왔는데 이제 어떡하나 싶더라고요.

 

옆에 낚시가게도 있었는데 희한하죠. 슈퍼가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여기다!’ 하고요. 저도 모르게 들어가게 된 거 같아요. 불쑥 들어간 제가 아주머니는 손님인 줄 아셨을 거예요. 실은 도둑이나 다름없었는데 말이죠. 들어와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죄송한데요 저 여기 동네사람인데 제가 지각을 해서 지금 정말 급해서요, 혹시 만 원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택시 타야 하는데 지갑도 놓고 와서요, 학교 갔다 와서 이따가 꼭 드릴게요, 어떻게 좀 안 될까요?”라니.

 

숨도 안 쉬고 그런 말을 뱉으면서 만 원 한 장 달라고 하는 제가 저도 어이없었어요. 이 슈퍼에 잘 온 적도 없으면서 그랬으니까요. 심지어 단골도 아닌데 막무가내로 돈부터 달라고  하니 이건 뭐 도둑이 따로 없는 거잖아요? 별 웃기는 아가씨를 다 보겠네, 하고 느끼셨을 거예요.

 

사실 아주머니께서 No라고 하시면 어쩌나 내심 불안했답니다. 곤란하면서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아주머니의 눈빛을 느꼈거든요. ‘도망가지 않고 다시 오겠습니다’의 증표로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집 열쇠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종이에다 제 휴대폰 번호를 빠르게 적었어요. 번호를 적으면서 이따가 꼭 들리겠다는 말을 계속 한 것 같네요. 그 모습이 하도 절실해보였는지 살짝 아리송한 얼굴을 하시곤 카운터 금고에서 만 원 한 장을 빼 제게 주셨어요. 그 만 원으로 저는 서둘러 택시를 탔고 간신히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도착은 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정신이 없어서 강의를 잘 못 들었어요. 수업 내내 아주머니 얼굴 한 번, 만 원 한 번 이렇게 번갈아가며 떠오르기 바빴거든요.

 

마치는 대로 곧장 슈퍼로 갔어요. 낮에는 뵙지 못했던 사장님과 동네분들이 가게 안에 계시더라고요. 아주머니께서 저를 보시고 “어! 이 아가씨야!”라고 하셨는데 그 말에 모든 분들이 “아, 이 아가씨야?”라고 하셨어요. 이미 저를 다 알고 계신 상황이 웃겼어요. 저는 그게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재밌기도 했고요.

 

임기응변으로 어찌저찌 마련한 만 원을 멋쩍게 건네면서 감사 인사를 드렸는데 절 보고 그냥 웃어주셨던 얼굴이 생각나요. 열쇠를 다시 챙기고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나왔던 것 같네요.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골목길을 올라갔어요. 아주머니가 제게 베풀어 주신 호의를 떠올리면서요.

 

아주머니께 만 원을 갚고 난 뒤에도 감사한 마음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몇 번 더 갔었어요. 그래봤자 한 두 번이 다였지만요. 그 이후로는 가지 않았고 저도 슈퍼를 꽤 오래 잊고 지냈어요. 만 원을 못 받아도 사실 당연했어요. 그렇지만 저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요. 누가 누굴 믿는다는 게 어려운 세상에서 그게 얼마나 귀한 일이었는지 요즘 더 실감하게 돼요. ‘그냥 만 원’이 아니었어요.

 

그런 부탁을 과감하게 해 본 적이 최근에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남한테 씩씩하게 도와 달라고 외쳐본 적도 언제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것도 꽤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용기가 점점 사라져요. 그래서 무모하게 뱉은 그때의 말이 가끔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지극히 개인적인 제 일에 동참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 이제 지갑 잘 가지고 다녀요. 혼이 쏙 빠진 그날 이후로 더 잘 챙기게 됐어요. 가방 속을 한 번 더 살피는 사람이 됐답니다. 아, 그리고 현금도 조금씩 챙겨 다녀요.

 

곧 있으면 여름이에요. 올여름도 제일 더운 여름이 될 것 같아요. 아주머니께서는 저를 기억하실까요? “저 기억하시나요?” 하고 용기 있게 여쭤볼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 서글퍼져요. 시간이 야속한 것만 같아요. 무더운 계절이 슬슬 오고 있어요. 정말 더운 날 아이스크림 사러 한번 들를게요.


건강하세요. 많이 웃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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