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자연
환경 오염, 황폐화, 자연 파괴와 같은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자연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필자의 경험이라면, 봄이면 흐드러지게 핀 꽃 사이를 날아다니던 수많은 나비와 꿀벌은 이젠 발견하면 반가울 지경이다. 항상 자연을 아껴 생태계를 이루는 것들이 모두 자신의 삶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배우고, 가르치고,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것이 지켜지는 게 얼마나 되나 싶다. 당장 산불만 하더라도 인간이 쓰레기를 태우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다른 생명체에 대한 존중은 단 하나도 없이 행하여 발생하는 경우가 잦고, 그것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역시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괴를 했으면 책임 또한 지는 게 이치이거늘 그것 또한 회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에 자연은 그 자체로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일어난다. 누가 자연이 순환한다고 하였는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순환이 아니라 폭력이라 칭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자연을 피해자라고 봤던 내 시각은 오랫동안 이어졌으나 <모노노케 히메>를 본 이후로 약간은 변하게 되었다. <모노노케 히메> 속 주인공 '아시타카'는 자연에 의해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로 인해 죽을 운명을 가지게 된다. 또한, 아시타카에게 상처를 입힌 멧돼지신인 나고는 총알에 의해 인간을 향한 분노를 사게 되었는데, 정작 그 총을 쏜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이끄는 유능한 지도자였기에 마을의 보호를 위해 총을 개발한 것이었다. 물론 인간이 본인의 탐욕을 위하여 과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 맞다. 자연을 토대로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에 감사해야 하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커다란 생태계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탐욕이 아닌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자연과 맞서야 한다면 그 때에도 인간만을 욕할 자격이 있는 걸까? '인간'과 '자연'이 아닌 '개체'와 '개체'라는, 갈등하는 존재의 공존으로 봐야하는 게 아닐까.
샬롯 맥커너히의 책 <늑대가 있었다>는 황폐화된 숲을 되살리기 위해 14마리의 늑대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향한 '인티'의 이야기이다. '인티'는 늑대가 적응만 한다면 숲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목은 훌륭한 인티, 그러나 당장 가축을 키우고 농사를 짓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미션이 있다. 당연히 숲을 가꾸고 돌려놓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숲을 되살린다고 사람에게 위험한 늑대를, 당장의 생존을 책임지는 가축들에게도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늑대를 숲에 푼다는 것은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의 입장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인티는 연설을 한다. "늑대가 피바람을 불러올 거라고 진정으로 여러분이 믿고 있다면, 여러분은 눈뜬 장님입니다." 인티는 늑대 또한 그 개체로서 바라보면 피해만 주고 생존을 위협하기만 하는 동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늑대를 통해 숲을 되살려야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늑대가 최상위 포식자임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것이 위험하지 않다고, 이방인에게 쉽사리 내 보금자리의 안전을 맡길 수 있겠는가. 인티는 늑대의 본능 - 자신의 하위 생명체를 잡아먹어 생존을 유지하는 것 - 까지도 조건으로 내밀며 늑대가 양을 한 마리라도 해칠 경우 이 프로젝트를 철수하겠다 설득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의심과 분열은 더욱 심해질 뿐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당장의 생계를 선택하되 무너진 숲과 함께 살겠는가, 미래의 울창할 숲을 생각하며 현재의 삶을 포기하거나 혹은 위험한 도박수를 띄우겠는가? 미래에 다가올 풍요로운 자연은 미래의 나에게도 분명히 좋은 영향이 올 것이란 걸 알지만 '다가올' 일지, '다가올 수 있는' 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던 중 방목장에서는 늑대가, 숲 속에서는 사람이 죽어있는 것이 발견된다. 늑대는 누가 죽였고, 사람은 또 누가 죽인 걸까. 최악은, 사람이 늑대를 죽이고 늑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나마 늑대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목격하지만 사람은 인티 혼자 발견하였기 때문에 인티는 더욱 심각한 내적 갈등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늑대가 사람을 죽였다면 본인이 내세웠던 조건에 의거하여 늑대를 살처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체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죽음의 원인을 밝혀야 할까, 혹은 늑대가 죽였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차단하여 프로젝트를 지속하여야 할까? 인간과 자연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여야 할까? 이 문제는 이제, 마을 사람들을 넘어 인티에게도 선택의 기로로 몰아세운다.
이처럼 <늑대가 있었다>에서 늑대는 자연 그 자체 - 선이지도 악이지도 않은 - 를 나타내는 장치로서 환경에 대한 고찰, 생태주의에 대한 갈등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활용된다. 따라서 만약 <모노노케 히메>를 본 독자라면 늑대를 '모로족', '멧돼지족' 등 자연을 대표하는 동물들에 이입하여 자연의 순환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이해하며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늑대, 인간
인티는 늑대와 숲 프로젝트 외에도 인간관계로 많은 갈등을 겪는다. 먼저, 쌍둥이 동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쌍둥이 동생인 애기는 말을 하지 못하고 밖을 나오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인티는 그런 애기를 다시 과거의 밝은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한다. 또한, 던컨이라는 경무관과 관계가 발전하며 힘겨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애기의 회복도, 던컨과의 관계도 뜻대로 쉽지만은 않다. 특히, 던컨이 폭력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 점차 밝혀지면서 인티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 대 인간으로 갈등을 겪는다.
상단에 서술하였듯 숲의 재생에 대한 관점이 달라 겪는 인간과의 갈등이 존재한다면, 인간 그 자체로서의 인티가 겪는 갈등도 강조된다. 특히, 죽은 14번 늑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잔인한 반응과, 숲 속에서 죽은 사람이 사실 가정폭력을 수도 없이 저지른 가해자라는 것, 그리고 진짜 범인에 대한 진실에 대해서는 완전히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꼈다. 마을 사람들의 생계에 대한 사정에 공감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발생하는 본능, 혹은 그걸 넘어선 폭력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늑대가 사람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필자는 <늑대가 있었다>를 읽으며, 책의 주요한 소재인 늑대는 오히려 인티의 인간으로서 인간과 겪는 갈등과 고뇌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써의 면모가 핵심이라고 느꼈다. 즉, <늑대가 있었다>는 환경주의에 대한 표면적 주제로 가지면서 인간 군상과 사회에 대한 관계성를 내면적 주제로 하여 복합적인 융합을 이루어낸다. 따라서 독자들은 자연과 인간 모두를 하나의 개체로 두어 해석하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늑대가 있었다>는 갈등으로 시작되어 갈등으로 끝나는 책이다. 그러나 독자는 그 갈등 속에서 나는 생태학적인 관점과 인간 사회의 한 일원인 관점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고찰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늑대가 있었다>를 다양한 방면으로 읽고 능동적으로 해석해보길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