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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아홉 달 전, 나는 번아웃을 겪었다. 흔히 번아웃(burn-out)은 에너지 고갈 상태로 정의되지만, 내게는 무력감과 죄책감, 자기 부정이 한꺼번에 몰려든 감정의 파도였다. 군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원하지 않았던 낯선 파견지에서, 예기치 못한 부상과 함께 모든 게 무너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당시 나를 향한 주변의 걱정은 진심이었지만, 오히려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런 나를 붙잡아 준 건 다름 아닌 한 편의 소설이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천 개의 파랑. 감정을 지닌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와, 연골이 닳아버린 경주마 ‘투데이’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나는 전역을 한 달 앞두고 오늘, 그 책을 다시 꺼내 든다.



 

경주마와 기수로봇이 전하는 위로


 

이야기는 콜리가 경주마 투데이를 위해 일부러 낙마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경주를 계속하면 투데이는 걷지도 못하게 될 것이란 걸, 콜리는 알고 있었다. 이후 콜리는 폐기 직전의 로봇 신세가 되고, 투데이 역시 안락사를 앞둔 존재로 전락한다. 하지만 로봇 수리에 능한 소녀 ‘연재’와 그녀의 가족을 만나며, 이들은 다시 천천히 달리는 법을 배운다.

 

이 책은 달리기를 멈췄던 이들이 위로를 통해 서로를 일으켜 세우며 다시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콜리는 마지막 경주에서 또다시 낙마해 산산조각나지만, 투데이는 기적적으로 안락사를 피하고 넓은 초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달리기’란 단지 경주의 속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존재 그 자체, 살아가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군 복무 중 낙상 사고로 무릎에 골절과 물이 찬 후, 나는 단지 ‘쓸모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부상으로 중대의 일을 도울 수 없었고, 대신 투입된 동기에게 미안함과 자책이 쌓여갔다. 누구 하나 나를 비난하지 않았지만, 내 안의 목소리는 나를 가차 없이 몰아세웠다. 무기력과 자괴감은 생각보다 더 깊고 날카로웠다.

 

그 무너진 시간 속에서, 내게 도착한 한 문장이 있었다.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소설 속 콜리가 투데이에게 전한 이 말은, 곧 나를 향한 위로였다.


나는 훈련소 이후 펼쳐보지 않았던 병영일기장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 “나는 지금 힘들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 속 은혜가 장애로 인해 믿고 있던 친구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학교를 그만둘 때처럼, 나 역시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은혜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언제까지 무기력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은 움직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했다. 다리를 깁스한 상태로는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았지만, 생수를 옮겨야 할 때는 한 쪽에 목발을 짚고 남은 손으로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다. 청소시간에는 대걸레를 지지대 삼아서 바닥이라도 닦았다. 조금이라도 중대원들에게 도움이 되니까 마음이 편해지며 깨달은 점이 있다. ‘아, 나를 갉아먹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이었구나.’ 나에게 가장 큰 부담감을 주고 있던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스스로를 경주마처럼 채찍질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불완전한 모습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계주 경기에서 더 빠르게 달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학교를 뛰쳐나가버린 연재의 모습, 소아마비로 인해 평생 휠체어를 타며 무력감이 일상이 되어버린 은혜의 모습, 남편의 죽음에도 두 딸을 키우느라 그날의 슬픔에 머물러있는 보경의 모습까지. 그들의 모습은 점점 더 빠르게 달리다가 연골이 다 닳아 버린 경주마 투데이와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나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천천히 달려도 괜찮다는 삶의 이치


 

나는 완벽주의자였다. 실패는 허용할 수 없었고, 책임감은 자주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 채찍을 들고 있던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더 빨리’, ‘더 완벽하게’라는 기준은 내 안에서 나를 휘감고 있었다. 경주마처럼 달려야만 삶에 의미가 있다고 여겼기에, 속도를 늦춘다는 생각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각자의 속도로 걷는 여정이라는 것을.


천 개의 파랑은 나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천천히 달리는 경주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문학이 내게 전해준 것은 거창한 위로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아직도 내 속도와 방향을 지켜주는 나침반처럼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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