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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연극을 보았습니다. 세계 최대의 예술 축제 ‘에든버러 페스티벌 프린지’에서 2022년부터 3년 연속 퍼스트 어워드를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제목은 <소년에게서 온 편지: 수취인불명>이었습니다. 저의 중요한 취미 중 하나인 연극·뮤지컬 관람에 목말라있던 상황에서 평소 관심사인 전쟁에 관한 2인 부조리극이라니 안 볼 이유가 없었죠.

 

연극에는 두 소년 ‘에이스’와 ‘메뚜기’가 나옵니다. 두 소년은 놀이 같은 훈련을 계속합니다.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기 위한 훈련이죠. 훈련의 지도자는 에이스고 수련생은 메뚜기입니다. 메뚜기는 터프한 에이스를 동경합니다. 남자답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기만 한 메뚜기는 훈련이 아무리 힘들어도 성실하게 수행하죠.

 

진정한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남자답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두 소년은 정확한 답을 모르지만, 그래도 확실한 롤모델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린든 B. 존슨 대통령이죠.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면 그들은 존슨 대통령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습니다. 멋진 남자가 되어 그를 위해, 조국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요.

 

10대 시절 6-70년대 영미권 록 음악에 심취한 적이 있습니다. 연극에서는 그 당시 제가 좋아했던 음악, 특히 비틀즈의 음악이 자주 나왔습니다. 연극의 배경이 되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나온 음악이기 때문이겠죠. 경험한 적 없는 향수에 젖어 들었던 노래들이 그 자리에서는 전혀 다르게 들렸습니다. 그 시기의 로커들이 부르짖었던 평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드디어 와닿았달까요.

 

이 연극의 부제인 ‘수취인불명’은 ‘받는 사람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편지는 소년들의 독백일 것입니다. 그들은 허공에 대고 열심히 말합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존슨 대통령을 존경하는지, 강한 남자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 편지는 누구를 향한 걸까요? 수취인불명이지만 영어 원제를 보면 후보는 있습니다. 존슨 대통령이나 신, 둘 중 누구든 먼저 읽는 사람이요. (A Letter To Lyndon B. Johnson Or God Whoever Reads This First)

 

저는 압니다. 그들의 편지는 존슨 대통령이든 신이든 그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요. 어떤 노력을 했든 얼마나 진심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만이 최고인걸요. 그 거대한 전쟁 중에 소년 한두 명의 목숨을 누가 신경 쓰겠어요. 그래요, 어쩌면 소년들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자기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 하는 말일 수도 있겠죠. 그래도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편지가 적어도 저에게는 닿았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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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논픽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폭력을 옛날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무감각하게 받아들여도 될까. 이런 생각이요. 책에서 다루는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를 생각하면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전쟁은 거의 어제 일어난 일이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며칠 전, 이 연극을 보며 몇 년 전에 했던 생각이 무의미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전 세계 소식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시대를 살면서도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에서는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잖아요. 그래요. 우리는 옛날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어요. 지금 당장의 전쟁에도 관심이 없잖아요. 아니, 일부러 외면하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었을 때의 질문은 폐기되었지만, 그 대신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떠올린 질문이 소환되었습니다. 4.3 사건을 다룬 그 소설을 읽으며 허공에 대고 물었죠.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냐고요.

 

성선설을 안 믿게 된 지는 꽤 됐지만, 폭력의 심연은 여전히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분명 권선징악을 다 함께 배웠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처음부터 인간은 악한 존재인데 제가 헛된 기대를 한 걸까요? 본래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지만, 왜 굳이 타인을 죽이고 강간하고 고문하는 걸까요? 대체 무엇을 위해서요?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공격에 방어하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대통령에 충성하는 메뚜기와 에이스가 지금은 없을까요? 아이들의 장난과 죽고 죽이는 전쟁이 구분되지 않는 건 그 시대만의 일일까요? 지금의 10대 소년들도 무슨 의미인지도 고민하지 않은 채 혐오를 발산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게 보편적인 유희로 자리 잡지 않았던가요? 대체 누가 이 아이들을 책임지나요? 왜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이 이 폭력을 감당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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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저도 소년들처럼 받는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편지를 썼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의 당위성을 모르겠다고요. 제발 이 끔찍한 폭력을 멈춰달라고요. 대통령이든 신이든 그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요.

 

이 편지도 당연히 전달되지 않겠죠. 의도적으로 차단당한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죠. 전쟁을 멈출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 곧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니까요. 전쟁은 국가도, 자유도, 정의도 아닌 그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니까요.

 

갈 곳을 잃은 편지는 결국 제 마음속 서랍장에 봉인했습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편지에 스스로 답장을 쓰면서요. 그 어떤 죽음도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만은 잊지 않겠다고요. 이렇게 무력한 나라도 끝까지 함께 아파하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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