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을 포함한 예술 애호가들의 머릿속에는 저마다의 우상으로 채워진 예술 신전이 있기 마련이라고 저자는 말하지만, 입문자라는 표현도 과분하게 느껴지는 내게는 일정한 규격이나 뚜렷한 질서 없이, 그저 좋다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그때그때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들이 난잡하게 늘어선, 좁은 다락방 정도로 소개하는 편이 훨씬 어울릴 것 같다.
물론, 비록 그들이 현재 점유 중인 이 공간이 다소(?) 초라하다는 점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겠으나, 장소의 하잘것없음에 매우 황송하게도 나의 우상들의 명예와 위상은 단연코 감히 낮잡아 볼 수 있을만한 수준들이 아니다. 평생을 마이너와는 한참 거리가 멀게 지극히 메이저 한 범위 내에서 문화생활을 향유했고, 원석을 가려낼 심미안이나 재목을 선점할 미학적 식견과는 도통 가까워질 길이 없으니, 이미 걸작이라 칭송받는 작품들 중에서 다분히 안정적인 취향을 소지하게 된 결말이 아닐까. 한 마디로 귀하신 분들을 누추한 곳에 모신 셈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취향이란 그다지 눈여겨볼만한 것은 아님에 분명하다. 본디 무엇을 선호하는지 만으로 한 인간을 정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며, 애초에 그들 중 상당수는 명확한 이유나 특별한 배경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취향을 안다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예술 취향은 그 소지자의 가치관을 내포하는 경우가 많다. 취향이 가변적이라는 저자의 표현에 십분 동의하듯, 한 사람의 가치관에도 일생에 걸친 끊임없는 지각변동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미숙한 내면만큼이나 지금은 볼품없는 나의 다락방 역시, 크고 작은 진화와 그보다 긴 공회전, 어쩌면 때론 전복을 거쳐, 한참 세월 뒤에는 그럴듯한 신전의 모습을 갖추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페피엇’처럼.
따라서 이 모든 초상은 어느 정도는 자화상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린 초상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는 자화상만큼이나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초상이 또 있을까?
- 21p. <들어가는 글: 위대한 예술가들의 초상이자 나의 자화상> 中
세계적인 미술사가이자 전기 작가, 큐레이터인 마이클 페피엇은 예술 평론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이다. 60여 년간 동시대 예술가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교류하며 평전, 인터뷰집, 칼럼, 전시회 카탈로그 등 수많은 글을 썼고, 그들의 삶과 작업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한 책들로 주목을 받았다.
반 고흐, 베이컨, 자코메티, 호안 미로, 앙리 미쇼 등, 이 책에서 소개하는 27인의 예술가들은 저자가 자신만의 신전에 모신 최상위 작가들이다. 미학적으로 높게 평가하며 본인의 취향과 감수성에 가장 잘 와닿는다는 이유로 떠받들지만, 개인적인 친분을 넘어서 비평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세기 거장들과의 인터뷰와 예술 세계, 그들과 함께했던 경험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이 책은, 단순히 작품에 주목해 그림 양식과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성장 환경, 생각, 삶의 태도, 인간관계, 창작 과정, 예술관 등을 살펴봄으로써 개인적인 삶이 어떻게 예술과 얽히는지를 탐구한다.
물론 예술가의 삶이 언제나 작품만큼이나 흥미로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작품의 이미지가 태동하고 발전해 가는 양상을 유심히 살펴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써 들여다보면 작품만큼이나 흥미롭다. 삶은 모든 예술의 담론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며, 복잡하게 얽힌 이 둘의 관계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둘이 서로 미묘하면서도 때로는 자기 성찰적으로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 19p. <들어가는 글: 위대한 예술가들의 초상이자 나의 자화상> 中
나의 예술적 취향을 구성하는 여러 하위 요소 가운데, 유독 ‘미술’에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있다. 여타 분야라고 딱히 전문성이나 기술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소위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해도가 전혀 발전할 기미가 보이질 않고, 이론적인 부분을 차치하고도 스스로 심미안을 타고나지 못했음을 절감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면, 이토록 자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취향의 기준이 퍽 진지하다는 점에 있다. 이 둘 사이의 불균형이 미술과 나 사이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나의 관심은 눈앞의 작품보다 그 너머의 사람을 향해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어떤 작품이 단박에 얼마나 좋은지 포착해 내기보다는, 이를 창조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고서야 스스로 그 진가가 무엇인지 판단을 내리는 걸 선호한다. 잘 모르지만, 하나의 예술 작품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 예술가의 시각, 즉, 그의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세계관이란 그 사람이 살아온 족적과 결코 무관할 수 없기에, 내게 미술 취향을 논한다는 건 때론 인생관을 드러내는 것과 닮아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이 특히 반가웠던 건, 예술 취향을 다루는 저자의 가치관이 나의 추구 방식과도 비슷한 방향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미술평론가가 힘을 실어주다니, 인생관이란 거창한 소개에도 제법 자신이 붙는다.
그 방향성에 걸맞게, 작품보다도 그 창작자의 삶의 궤적에 집중한 책이니 만큼, 해당 인물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꺼운 분량에 활자들만이 가득 차 있다. 소위 미술사를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림 한 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낯설었다.
그럼에도 결코 지루하지 않았던 건, 위트 있는 문체와 진정성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마이클 페피엇의 글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로 성공한 사람 특유의 재기 발랄함이 느껴졌다. 속된 말로, 정말이지 성공한 덕후가 아닌가!
여기에서 다루는 모든 예술가는 수년에 걸쳐 내가 가장 추앙해 온 인물들이며.. (중략) ..이런 인물들에 대한 글을 쓴 지 장장 60년 가까이 되는데도 이 중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예술가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흐뭇할 따름이다.
- 18p. <들어가는 글: 위대한 예술가들의 초상이자 나의 자화상> 中
1. 빈센트 반 고흐: 그림자와 햇빛의 사이에서
모네의 생생함이나 세잔의 혁신적 구성이 우리의 주의를 차근차근히 끈다면 반 고흐는 자꾸 소맷자락을 당기며 광적인 강렬함을 발산하는 이미지를 마주하도록 다그친다. 그 다그침은 뭐랄까, 예전에 목사가 되려다 실패했던 이 네덜란드인 화가가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한 다급함이 묻어난다. 세상이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 수 없다면 직접 보게 하려는 그런 다급함이.
- 30p. <빈센트 반 고흐: 그림자와 햇빛의 사이에서> 中
예술가들의 삶을 조명하는 책을 여는 글에 ‘빈센트 반 고흐’에게 바치는 헌사만 한 선택이 없다는 저자의 말마따나, 나 역시 뻔한 레퍼토리로 그의 이야기에 대한 짧은 소회를 담아보기로 결정했다. 비록 나의 다락방에는 애초에 예술가들이 몇 분 못 모시고 있지만, 그럼에도 취향으로 일컫는 이 공간이 발현되던 때부터, 이 분야 나의 최고의 우상 중 한 명이 빈센트 반 고흐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중적으로 그러하듯 내게도 역시, 빈센트 반 고흐만큼이나 작품과 함께 그의 삶에 심취하게 하는 예술가가 따로 없다. 기본적으로 자기 이야기가 많은 사람을 좋아하고, 그 서사가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더욱 매혹적이기에, 비극적인 그의 생애와 이에 대응되는 강렬한 작품들은, 늘 이야기가 목마른 내게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인생관을 논하자면, 워낙 범상치 않던 고흐의 생애와 지극히 평범한 나의 삶에는 심한 괴리감이 있다. 또한 추구하는 삶의 방향 역시 딱히 일치하지는 않는 듯도 싶다. 그런데도 그의 삶이 인상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끝내 자살을 택했지만, 비극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굳건한 의지. 작은 바람에도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당장의 내게 꼭 필요한 삶의 태도가 아닌가 싶다.
반 고흐의 삶이 아무리 극적이었다고 해도, 비상한 재능이 없었다면 극적인 삶의 감정들을 그토록 강렬히 전달해 낼 수 있었을까?
- 28p. <빈센트 반 고흐: 그림자와 햇빛의 사이에서> 中
그의 결말을 다 아는 입장에서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제 다급한 부름이 사후에 이렇게 사랑받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기에 결국 무의미한 가정일뿐이라는 결론을 내리다가도, 그럼에도 한 사람의 생애가 이토록 오래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경이롭다.
12. 앙리 미쇼: 화가이자 시인
단연코 싫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삶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지면상의 변화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변화가 삶 자체 내에서 일어나길 바랐다.
- 183p. <앙리 미쇼: 화가이자 시인> 中
앙리 미쇼를 소개하는 데 페이지를 할애하기로 한 건,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이 예술가가 나의 내밀한 갈망을 모두 실현화시킨 비범한 천재였다는 점에 있다. 시의 거장이자 천재 화가. 남들은 생애에 하나도 온전히 달성하기 어려운 두 가지 재능을 모두 최고의 경지에 도달시키다니, 문학적 성취에 갈급하고 미술적 표현에 남모를 동경이 있는 내겐 마냥 부러워 괜한 시기가 비집어 나오게 한다.
단순히 다재다능한 천재였다는 사실뿐 아니라, 삶 자체가 예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주제와 잘 어울리는 탐구 대상이기도 했다. ‘앙리 미쇼’의 생애사를 살펴보면, 그의 예술관 자체가 다분히 철학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내면세계에 대한 근원적 탐구욕이 있던 이 예술가에게 삶에 대한 온전한 통제권을 그러쥘 수 없는 인간 존재란, 본질적으로 나약하고 박탈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예술이란 이러한 삶의 모순과 불가능성에 맞선 대항의 장이자 해방의 공간이었다. 삶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 창작 활동의 주 목적이 되는 동시에, 창작을 통해 비로소 삶의 고통에서 탈출할 수 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앙리 미쇼는 무한한 유동성이 가능한 그림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
글쓰기 역시 우리를 또 다른 현실로 보내 삶을 재해석할 수 있는 변화구가 되어주지만, 언어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으나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더 이상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회화는 무한한 공상을 바탕으로 나만의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다.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였다.
그의 말대로 필멸의 운명이라는 손아귀에 붙잡혀 사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힘에 운명의 시간을 늦춰 달라고 빈다. 헛되이. 계속 살게 해 달라고 소리쳐 빈다. 끊임없이. 미쇼의 독창성은 끊임없음을 주제로 택해 죽을 운명을 하나의 도전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 190p. <앙리 미쇼: 화가이자 시인> 中
통제되지 않는 삶과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 존재에 회의를 느끼는 만큼, 온전히 제 수중에 달려있는 창작 활동의 카타르시스가 제법 와닿는다. 물론 능력이란 게 늘 마음에 따라주는 법은 아니기에 그 과정에는 또 다른 고통과 무력감이 따르겠지만, 어찌 됐건 그 주도권이 내게 주어졌다는 점에서 창작이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19. 조란 무시치: 다하우 강제 수용소 이후의 창작
무시치의 성찰에서 노년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불타오르거나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는다. 강인한 생존자의 블랙 유머가 가미된 체념 섞인 멜랑콜리로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일 뿐이다. 이 간결하고 어두운 자화상들 속에서 구원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빛이 희미해지는 순간까지 미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해답을 찾고자 했던 조란 무시치는 우리에게 인간이 지닌 불굴의 정신을 믿어야 하는 강렬한 이유를 남겼다.
- 297p. <조란 무시치: 다하우 강제 수용소 이후의 창작> 中
역시나 초면인 또 다른 예술가에게 남모를 유대감을 느낀 건, 장소가 주는 개인적인 기억 때문이다. 다하우와 베네치아, 조란 무시치의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이 두 장소가 내게도 나름 각별한 의미가 담긴 장소였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한 달 동안 떠났던 유럽 여행, 5년의 세월 동안 꽤 많은 감상이 흐려졌지만 앞선 두 장소에 관한 기억은 꽤 생생하다.
뮌헨에 머물던 당시 근교에 나치 강제 수용소가 있다는 정보에, 다소 충동적으로 방문을 결정한 곳이 ‘다하우 강제 수용소였다’. 나치가 세운 최초의 강제수용소로 이후 나치의 여러 수용소에 영향을 주었으며, 아우슈비츠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상당히 넓은 부지에 조성된 기념관은, 당시의 잔혹성과 참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실제 수감자들이 생활하던 공간도 복원되어 있었는데, 내가 딛고 있는 바로 이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라 때때로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던 분위기와 괜스레 닭살이 돋아나던 감각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한 달의 시간 동안 거의 유일하게 방문했던 어두운 공간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베네치아는 다하우와 반대의 의미로 인상적이었던 공간이다. 평안하고 그야말로 힐링이 되었다. 원래는 베네치아에서는 1박의 일정만이 잡혀 있었는데, 직전에 머물던 숙소에서 베드 버그가 출몰하면서 도피하다시피 하루 먼저 방문하게 된 도시였다. 갑작스러운 사고와 빽빽한 일정에 지쳐있던 심신을 오랜만에 낮잠으로 회복하고 늦은 오후에야 숙소 밖을 나섰는데, 별다른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그 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비현실적인 수중 도시의 풍경과 파란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색적인 곤돌라,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하면서도 빛바랜 색감이 이유 모를 멜랑꼴리함을 느끼게 하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내 걸어 다닌 기억밖에 없는데도, 문득 그 물 비린내마저 이유 없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다하우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무시치의 작품이 그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과장된 표현도, 복수심이나 분노의 흔적도 없다. 무시치는 그저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건 일어난 일이야. 일어나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일어나고 말았어.”.. (중략) ..오직 이름 없는 시체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희생자들만이 놀라울 만큼 절제된 화풍으로 그려졌다. 마치 극도로 조용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소멸된 존재는 거친 결이 드러나는 캔버스의 표면에 희미한 흔적을 남길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감상자에게 ‘우리가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절대적인 진리이자 강렬한 경고를 남긴다.
- 295p. <조란 무시치: 다하우 강제 수용소 이후의 창작> 中
그저 장소의 우연성만으로, 여행 중 작은 해프닝에 불과한 나의 추억을 감히 누군가의 삶의 격랑에 맞붙인다는 건 상당히 무례한 일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고작 한 번의 방문만으로 함부로 사랑을 칭하는 바로 그 도시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예술 활동을 펼친 어느 예술가가, 창작을 통해 승화시키려 했던 통각의 기억과, 존엄성이 말살된 공간에서 끝까지 견지하고자 했던 따뜻한 인간미를 추념하며, 결코 삶에 굴복하지 않은 예술가의 기백을 기린다.
“창작은 삶의 격랑에 맞서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표지 제목 밑에 붙어있던 소제목을 상기한다. 삶이라는 거친 투쟁의 장에서 창작을 통해 지난한 시간을 ‘살아낸’ 예술가들. 위대하다는 찬사 뒤에 가려진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일 뿐인 그들의 치열한 고뇌와 투혼을 추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