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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화성학을 배운다.

   

'도' 위에 어떤 음이 쌓이는지, 그 다음엔 어떤 음의 조합이 나와야 매끄러운지 뜯어보는 학문.

 

음정에 익숙해지면 장·단음계를 배운다. 장·단음계에 익숙해지면 3화음을, 3화음이 익숙해지면 7화음을, 7화음이 익숙해지면 특수 화음을 배운다. 학문이 다 그렇듯 화성학에도 공식이 있어서 '안정적'인 화음과 진행만 따라 해도 노래 한 곡을 만들 수 있다. 유명한 노래도 대부분 이 공식을 따른다. 비틀즈의 'Let It Be'와 악동뮤지션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는 같은 코드 진행을 공유한다.

 

어쩌다 화성학에 꽂혀 1년 전엔 학원을 짧게 다녔다. 6개월 전엔 화성학 초급 강의를 간신히 끝냈다. 지금은 뮤지컬 동아리에서 매주 작곡 세미나를 듣고 있다. 오선지에 음표를 하나씩 그린다. 혹은 이미 그려진 음표를 보고 어떤 화음인지 계산한다. 화음마다 미세한 차이를 느끼기 위해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눌러본다. 음 4개에서 1개만 바뀌어도 느낌이 확 달라진다.

 

한 코드를 시작점으로 삼는 순간, 다음 코드와 마지막 코드가 정해진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C코드로 시작한 노래는 거의 C코드로 끝난다. 그래야 듣는 사람들이 안정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화성학은 결국 불안정한 음이 안정적인 음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불안정성을 어떻게 전달할지, 언제 청자 혹은 독자에게 안정성을 선물할지는 곡마다 다르겠지만. 이 과정을 '긴장'과 '해소'로 도식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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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은 '긴장'과 '해소'로 구성된다. 안정적이었던 세계나 인물에게 찾아온 긴장감,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되니까. 이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할지, 어디서 해소할지는 작가에게 달려 있다. 확실한 건 예술은 긴장으로 이뤄져 있고 이 긴장은 언젠가 해소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감이나 천재성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물이다. 영감이라고 생각했을 때의 환상성이나 몽환성도 좋지만, 오히려 그 작품이 계산된 결과물이라는 걸 알았을 때-그 계산이 얼마나 치밀했는지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 될 수 있다.

 

계산된 조합을 뜯어보는 것. '좋다'는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그 감상을 주는 작품의 레이어를 분리해 보는 것. 분리한 것을 토대로 나만의 레이어를 구축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 나의 마음을 건드린 레이어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 이 즐거움은 비평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화성학을 배우려는 이유와 비평을 쓰고 싶어 하는 이유가 연결된다.

 

비평이라기엔 사소한 글을 아트인사이트에 일주일에 한 편씩 기고하고 있다. 소재를 찾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뮤지컬을 보지만, 뮤지컬로 글을 쓰려는 시도는 계속 좌절됐다. 뮤지컬이 좋은 이유는 대부분 음악인데, 음악으로 글을 쓰는 일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목정원 공연예술이론가는 책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서 이 어려움을 언급한 바 있다.


 

왜냐하면 공연예술은 시간예술이기 때문이다. 그 존재 방식이 시간에 기대고 있어, 발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예술. 작품을 다 본 순간 그것은 이미 세상에 없다. 그것은 사라졌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며, 기억도 금세 바스라진다. (중략) 대개 공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가쁜 호흡으로 이루어진다. 흐릿해지기 전에, 영영 지워지기 전에. 그러나 아무리 현재적이어도 그 글쓰기는 공허를 면할 수 없다. (중략)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 당신은 내가 본 그것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묘사하는 나의 문장은 당신에게 기어코 낯설 것이다. 나의 흥분은 기이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독서를 계속할 인내를 품기가 어려울 것이다.

 

- 책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5쪽

 

 

저자가 언급한 '글쓰기의 공허'를 면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최대한 많이 읽고 글에 끌어오기'였다. '좋다'는 감상만으로는 글이 될 수 없으니까, 자료라도 끌어와야 내 얕음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공연 예술이, 음악이 좋다는 데에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화성학을 배운다. 내 음악을 만들고 싶어서도 있지만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상도 높게 보고 싶어서. 이 긴장감 있는 과정이 해소까지 이어질진 모르겠다. 다만 어떤 곳에서는 이 긴장뿐인 과정도 음악이 되겠지, 누군가는 이 과정에서 자기만의 레이어를 찾아내겠지, 여기며 살아갈 뿐이다. 책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의 말처럼, "어쩌면 삶도 한 편의 공연처럼 흘러가면 그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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