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꿈꿔왔던 한 달의 유럽 여행을 마쳤다. 영국을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를 거쳐 이탈리아와 스페인까지. 같은 계절을 한국에서 여러 차례 봐오긴 했지만 유독 그곳에서 보낸 봄은 다채로운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부둥켜안고 있던 마음이 새순이 되어 돋아나는 시기.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 경량 패딩을 껴입어야 했다면, 남쪽 국가로 내려올수록 점차 따듯해진 날씨에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다행스럽게도, 맑은 날이 많았다. 우기가 겹쳐 비성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따사로운 햇볕이 연일 내리쬐었던 지난 한 달이었다. 덕분에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실내뿐만 아니라 다양한 실외 명소 스팟들도 방문해 볼 수 있었다. 특히 교과서, 각종 대중매체에서만 봐왔던 빅벤, 에펠탑 등 랜드마크를 볼 때면, 정말 낯선 땅에 와있다는 낯선 설렘이 때때로 찾아오기도 했다.
모든 순간 나는 혼자였다. 처음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고 장거리 비행을 떠난 것도, 각 여행지에서 필요한 것을 위해 사람들과 소통한 것도, 한 도시가 익숙해질 때쯤 기차를 타고 새로운 목적지로 달려가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그래서 종종 기대지 못해 힘든 순간도 있었으나, 배움이 있어 외롭진 않았다. 이번 여행은 내게 겉으로 느껴지는 행복과 안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알려줬다.
여행, 특히나 타국으로의 여정은 낭만을 좇는다는 말이 맞다.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 사람들과 음식.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는 순간 속에서 오로지 우리의 선택을 믿는다. 저마다의 여행 스타일은 다르겠지만,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을 맛보거나 중요 랜드마크에 들러본다거나, 궁금했던 장소들을 방문해 본다. 한껏 벅차오르다가 말기를 여러번 반복하다 보면, 그때마다 ‘행복하다’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알게 된다.
그래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멀고 먼 동양의 땅에서 온 여성은 늘 약자로 여겨져 무시를 당하거나 모르는 사람이 자전거 벨이나 오토바이 경적을 울리며 인사하기가 일쑤였다. 또 쉽게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는데,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도시 바르셀로나에서는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쉽게 그 대상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대륙의 거리만큼 너무나도 다른 문화의 차이일까. 달콤한 구름 사이를 헤쳐 날아가다가, 거대한 벽에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혀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저 세상과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인데, 마음처럼 모든 게 쉽게 흘러가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의 모든 경험들이, 느낌이, 긴장이 내게 흡수된다면 어떨까. 실제로 여행을 준비하며 읽었던 서양 미술(로버트 윌리암스) 책에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내용이 다음처럼 담겨있었다. 미술사 이해의 초석이자 시발점이 되는 고대의 사상을 풀어 설명해준 것으로, 절대진실과 절대선처럼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는 절대미, 즉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피상적인 자극을 이겨내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며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다.
["대화를 기록한 『대히피아스(Hippias Major), 편에서 플라톤은 아름다움과 선함을 구분 지었지만, 다른 저서들에서는 아름다움과 선함의 연관성을 지적하며 절대적 아름다움(절대미)의 존재를 주장했다. 절대미란 절대 진실과 절대선과 함께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며, 본질적으로 서로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대상의 피상적인 자극으로 인한 정신적 분산을 잘 이겨낸다면, 결과적으로 개인적 성장을 이루게 되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예술의 꽃이라고 불리는 유럽 대륙을 조금 더 깊게 알고 싶어 꺼내 들었던 책에서는, 의도치 않게 내 마음을 울리는 구절이 담겨있었다. 여행의 모든 과정에서 본질을 단단하게 만들어 흔들리지 않는 절대성은 스스로에게부터 나오는 것. 무수한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정의가 달라질 순 있겠지만 결국 그런 현실의 흩날린 파편들을 잘 모아 나의 감각과 경험으로 재탄생하게 만든다면, 그만한 나다움, 아름다움은 진실과도 같기에 유일무이 한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때 느꼈던 낯선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 퇴적암처럼 켜켜이 쌓여 오롯이 내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 덕분인지, 조금 더 의연해지는 방법을 알게 됐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도 됐다.
- 이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