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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영화 <보이 인 더 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태어나 좋았던 점을 꼽으라고 하면 언제나 웃음기를 빼고 좋은 공기라고 답하곤 했다. 으스대려는 건 아니지만, 우물에서 꽤 잘난 개구리로 10여년을 살아오면서 항상 권태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단순히 조숙했다기엔 정말로 모든 게 따분했다. 고향 밖으로 제대로 나가본 적도, 해외 여행을 가본 적도 대단히 많지 않으면서 내가 살던 곳이 다른 세계에 비하면 무척 작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타지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도 세계는 여전히 좁았다. 학년 당 100여 명의 학생이 교실과 기숙사 독서실에서 새벽까지 공부하며, 고작 4명에게만 허락되는 1등급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자신이 특출난 학생이라는 얄팍한 자만심이 무너진 후 또 다시 권태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목표가 눈앞에 놓였다. 이제는 숫자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제한하는지 알지만, 그때는 그런 판단이 어려웠다. 껍질 안 세계도 세계다. 그 세계에 몸담고 있는 자라면 그 세계의 법과 세계관에 굴복하는 게 편하게 사는 방법이라는 걸 안다.
순응하고 체념했던 기억 때문에 십대 시절을 떠올리면 행복을 느낀 적은 그다지 없는데, 트라우마에 가까운 기억과 감정을 상기하는 게 싫지 않을 때가 드물게 있다. 가장 최근에는 시사회를 다녀왔던 <보이 인 더 풀>을 보면서 그랬다. <보이 인 더 풀>은 학창 시절 가장 강렬했던 자격지심을 물비린내와 수영장의 락스 냄새로 소환한다. 스크린 안에서 물은 영롱하고 등장인물들의 표정은 읽기 어렵다. 아름다운 시퀀스가 연결되는 가운데 감정은 점점 혼탁해지지만, 그 오묘한 감정을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빛을 내든 같은 별인 우리
<보이 인 더 풀>은 '석영'이 이사 온 마을에서 '우주'를 만나 수영이라는 접점을 통해 가까워지는 데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주는 수영을 배우지 않고도 수영을 잘하는 비밀이자 비결인 발에 있는 물갈퀴를 석영에게만 보여준다. 이 둘만의 비밀은 두 사람이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석영과 우주를 여전히 연결해준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 석영은 우주가 수영장에 양말을 신고 들어가면서까지 숨기려 했던 물갈퀴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때까지의 석영은 우주의 비밀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석영에게 수영은 애착의 대상이자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트로피처럼 남에게 보여주면 자신에게로 시선이 모이는 게 바로 석영의 수영이었다. 우주와 수영으로 가까워지고 싶었던 마음은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성적 판단이 가능해도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초등학교 6학년에게 자격지심은 너무 큰 문제가 됐다. 둘 사이 유대감을 형성해주었던 물갈퀴의 비밀은 이로써 의뭉스러운 형태로 남는다.
이때부터 <보이 인 더 풀>이 꿈과 열정을 피워내는 청춘물일 것으로 기대했던 예상과 달리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사실 둘의 관계 변화는 GV 중 류연수 감독의 인어공주 모티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우주와 석영은 바다에서 처음 만난다. 우주는 동화 속 인어공주가 왕자에게 그랬듯 석영을 바다에서 구해내고 둘은 이를 계기로 우정을 쌓는다. 인간 왕자와 인어공주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둘 중 한 명의 죽음을 가리켰듯, 이런 좋은 관계의 시작을 배반하고 석영과 우주의 관계는 점점 서로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영화의 중반쯤 왔을 때는 청춘물이 시릴 정도로 아픈 푸른색을 하고 있다는 걸 어째서 잊고 있었는가, 싶은 생각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석영이 지닌 내적 갈등은 영화의 후반부 직전까지는 끝없이 깊어졌다. 서울로 올라가 교수님께 피아노 레슨을 받는 동생과 유명인이 된 우주와는 달리, 그토록 하고 싶었던 수영을 코치님의 말 한 마디에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단순히 미련이 아니었다. 그건 자신이 특별하다는 믿음 하에 그렸던, 수영 선수라는 미래의 분신이 죽어버린 후 느끼는 무기력에 가깝다고 느꼈다.
사실 석영이 그렸던 건 선수로서 최고가 되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릴 적 품었던 꿈이 인정 욕구,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우주를 이기고 싶은 호승심, 그리고 우주와 나란히 수영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우정을 밑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석영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석영이 꿈꿨던 것이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어차피 특출난 실력을 지닌 아이만이 수영 선수로 키워지는데 기왕이면 빛나는 별들 사이 가장 빛나는 별이 되는 게 더 매력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석영이 가지고 있던 모든 목표와 감정이 어떤 형태로든 보상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이 멋대로 자신의 가능성을 재단당했던 경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영의 꿈을 떠맡은 우주의 입장은 어땠을까. 우주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실적을 내려 노력하지만, 석영이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위치에 도달한 우주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온다. 석영이 자신에게 해준 말을 가장 강력한 동기로 삼아 수영을 해온 우주가 점점 자신의 내적 동기와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는 새로운 기록에 도전할 것을 끊임없이 강요받는 선수로서는 정체 시기였겠지만, 어른이 되기 직전의 청소년으로서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우주는 석영에게 격려받았지만, 석영이 그러했듯 어린 시절의 추억에 떠밀려 미래로 휩쓸려 왔다.
남들은 없는 물갈퀴를 달고도 계속해서 자신이 특별하기를 기대하는 주변의 시선에서는 헤엄쳐 나올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일 것이다.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 그 재능을 가볍게 펼쳐 보이고 환호를 받을 때의 감각을 뭇 사람들은 알 수 없지만, 한 자리에 계속해서 머무르기를 요구받는 기분은 어떨지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그것은 곧 고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석영은 특별하지 않은 자신의 존재를 좋지 않은 의미로 특별하게 여겼다.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자신의 격차를 상기하느라 특별하지 않은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며 결과적으로 고립된 것이다. 이런 맥락 안에서 볼 때 우주와 석영은 모두 각자의 작은 섬에 발 붙이고 사느라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외로운 존재였다.
두 사람은 바다와 수영장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아쿠아리움이라는 공간에서 비로소 서로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석영과 우주의 대화는 재회 후 어쩐지 계속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그 주변만을 맴돌며 갈등으로 이어지지만, 아쿠아리움에서 둘은 서로의 진심과 시선을 직간접적으로 이해한다. 결말에서는 같은 곳을 보면서도 내내 다른 생각을 하던 두 사람이 진정으로 마주해야 했던 건 서로였다는 걸 마음 속으로 인정했을 것이라고 예상해 보았다.
<보이 인 더 풀>은 이렇게 석영과 우주가 만나고, 멀어지고, 다시 같은 지점으로 수렴하는 여정을 통해 특별함과 특별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르면서 같은지를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달라 보여도 두 삶의 가치만큼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고민을 하는 것만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특별하지 않아도 인생이 끝나지 않고 특별하다고 해서 고독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 것이다. 다른 빛을 낸다고 해서 별이 아닌 건 아니며 어차피 우리 모두 평생 같은 우주를 유영하는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