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청량함뿐만 아니라 무거움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여름의 바다는 보이는 것만큼 반짝이지만은 않고, 돌연 습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내가 느끼는 여름이다. 영화 <보이 인 더 풀>은 이러한 청춘의 여름과 비단 가볍지만은 않은 감정을 화면 안에 담아내어 관객을 특별하면서도 여느 때와 같은 여름으로 끌어들인다.
<보이 인 더 풀>은 재능의 한계로 포기하게 되는 꿈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2007년 여름, 석영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내려가게 되지만 그곳에서 우주라는 소년을 만나 평생을 둘이서 함께 수영하자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수영에 재능이 있던 석영은 물갈퀴를 가진 우주에게 시샘, 선망, 열등과 같은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물갈퀴가 나아감의 상징이기라도 하듯 우주는 코치에게 스카우트 당해 상경하여 수영선수가 되고, 석영은 시골에 남아 더는 수영을 하지 않게 된다. 2007년 여름의 석영은 붉은색의 옷을 두른 열정적이고 자신만만한 아이였는데, 2013년 여름의 석영은 어딘가 냉랭한 사람으로 변해있다.
영화를 보며 석영에게 마음이 가는 부분이 참 많을 정도로 이 영화는 석영을 중심으로 현실적인 감정들을 풀어간다. 그만큼 석영은 복잡하고도 익숙한 인물상이다. 어쩌면 말하지 못할 우리의 내면을 가장 많이 닮아있는 석영은 무표정해 보여도 그 속에서 뒤엉키는 마음들이 훤히 다 보일 정도로 우리가 경험해 본 날것의 감정들을 담고 있다.
우주가 코치와 함께 서울로 떠났듯 석영의 동생 또한 피아노에 두각을 드러내 아빠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 교육을 받게 된다. 석영은 그런 상황 속에서 피아노를 어설픈 손짓으로 두드려볼 뿐이다. 재능과 떠남은 마치 고리처럼 연결되어있기라도 하듯 석영만이 시골에 남아있다. 고여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이러한 주변 상황은 석영에게 어떠한 박탈감을 주기도 한다.
반면 우주의 물갈퀴는 어째서인지 점점 옅어지고 사라지는 중이다. 우주는 훈련소를 말없이 떠나고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비밀을 유일하게 아는 석영에게 이를 털어놓게 되지만 석영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아마 석영은 우주가 돌아온 이유가 비단 그것뿐만은 아니길 바랐던 건 아닐까 짐작만 해볼 뿐이다.
두 사람이 나눈 관계는 특별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마냥 깊다고 할 순 없다. 석영과 우주는 평생 함께 수영하기로 약속했으나 그 찬란한 약속은 무참한 현실이 끼어들어 부서지고 말았으며, 우주는 석영의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타났다 돌연, 사라지는 것. 이는 위태롭기 마련이다. 우주의 물갈퀴는 재능의 시각적 표상임과 동시에 우주에게 있어 위태로운 요소이기도 했다. 우주는 어릴 적부터 물갈퀴를 보여주지 못할 비밀스러운 것으로 여겼으며, 자신을 돌연변이로 생각하게끔 하는 것으로 느꼈다. 또 동시에 점점 옅어지는 물갈퀴를 보며 수영선수라는 꿈의 단절을 느끼게 만드는 것으로도.
자신의 앞에 나타난 우주가 다시 수영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게 되면서 석영은 자신만이 고여있음을, 또 자신이 상실한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결국 열등과 시샘이란 감정에 취약해진 석영은 우주의 숨은 비밀을 묵은 감정들과 함께 툭 토해내고, 그 말은 구르고 굴러 우주가 자신의 물갈퀴를 절개하는 것으로 커지고 만다.
영화에서 우주는 물갈퀴를 가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석영이 샘하던 물갈퀴는 수영 세계에서는 결격사유였으며 결국 그 물갈퀴를 스스로 제거하게 되었으므로 결말 속 우주가 아쿠아리움의 잠수부가 되어 헤엄친다는 장면까지 도달하기엔 현실적으로 우주가 겪을 사이 과정이 너무나도 큰 부재로 남아있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석영의 환상에 가까울 테다. 석영과 우주의 관계 또한 우주가 물갈퀴를 절개한 날 그렇게 희미해지고 말았을 테니.
이 영화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이 없어졌다는 것보다 무엇이 ‘존재했는가’를 상기하게 한다. 우주의 물갈퀴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물갈퀴를 자르고 피가 흥건한 상태로 라인에 선 우주가 돌연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도 역설적으로 우주에게 무엇이 있었는지를 또 물갈퀴가 있어 고독하고 위태로웠을 우주라는 한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릴 적 석영에게 전부였던 수영과 우주가 사라지게 된 것 또한 석영에게 무엇이 존재했는지를 다시금 회고하게 만든다.
후반부에 석영은 어린 시절 헤엄치던 수영장에 돌아가 수영하다 빛나라는 아이를 만난다. 수영선수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빛나에게 석영은 이러한 말을 전해준다. 하다가 그만둬도 된다고. 그렇다고 네가 아무나가 되는 건 아니라고.
이건 석영이 빛나에게 하는 말이자 2007년의 석영에게 하는 말. 우주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는 말. 우리에게는 사라질 수 있음에도 하다가 그만둬도 되는 것들이 있다. 평범과 비범으로 구분 짓게 되는 현실에서 포기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아무나가 아닌 나로서 존재하므로.
영화를 보고 나니 특별함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깊은 곳에 파묻힌 물갈퀴란 비밀을 너만이 알고, 우리가 2007년의 여름에 함께 수영하며 평생 함께 수영하길 약속했단 사실 말이다. 둘이서 하는 수영이 대결하듯 변질한 적도 많지만 재밌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아린 청춘 영화가 바로 이 <보이 인 더 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