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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송보라] 로즈 이야기_포스터_edit.jpg

 

 

한 사람이 죽은 다음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말과 기억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가 죽으면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장례 의식을 치른다. 문화권마다 세부사항은 다르지만 망자를 기억하고 애도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그중 유대교의 장례 의식을 '쉬바(Shiva)'라고 부른다. 7일간 진행되는 쉬바에서 남겨진 자들은 나무 벤치에 앉아 죽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금, 무대 위에서 쉬바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름은 로즈. 여든을 훌쩍 넘긴 할머니다. 우리에게 <벤트>로 알려진 마틴 셔먼의 희곡 'Rose'의 주인공이다. 본래 연극이던 작품은 소리꾼 송보라와 박선희 연출을 만나 소리극 <로즈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정통 판소리에서 소리꾼은 3인칭 시점으로 이야기 바깥에 있지만, 소리극을 표방하는 이번 공연에서 소리꾼은 직접 로즈의 목소리가 된다. 그렇게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유대인 할머니 로즈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누군가를 위해 쉬바를 하던 로즈는 문득 자신이 죽으면 누가 쉬바를 해줄까 궁금해하며 지금껏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송보라] 소리극 로즈 이야기_셀렉본_ⓒ 제공 로즈이야기_촬영 김영도 (1).JPG

ⓒ 제공_로즈 이야기 / 촬영_김영도

 

 

로즈는 20세기 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있는 작은 유대인 마을 율티쉬카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불행과 행복이 교차하던 유년시절을 보낸 로즈는 고향을 떠나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한다. 거기서 유셀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이룬다. 지금의 우리와 별다를 바 없이 인생이라는 바다를 기우뚱 기우뚱 노 저어 가던 로즈에게 갑자기 큰 태풍이 불어닥친다. 제2차 세계대전과 600만 명이 넘게 학살된 홀로코스트가 로즈의 삶을 덮친 것이다.


이미 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다루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이 시기의 일들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짧은 문장으로 서술되는 사건들은 당시를 살던 개개인의 삶을 아주 구체적으로 파괴했다. 로즈의 삶도 거기에 있었다. 평온한 삶을 뒤로하고 하루아침에 게토로 내몰린 로즈는 그곳에서 오빠 부부와 조카, 남편을 잃는다.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어린 딸은 배가 고파 수프를 나눠주는 곳으로 달려가다가 우크라이나 출신 젊은 나치 군인의 총에 맞아 죽는다. 거대한 악의를 행하는 개인은 너무나 평범했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20세기 유대인의 이야기가 판소리라는 매체를 만났을 때 이질감이 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잠시. 로즈의 삶은 소리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판소리 특유의 거친 발성은 로즈의 애끓는 감정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판소리에 맞게 번역되고 전라도 사투리로 다듬어진 말들은 먼 외국의 이야기를 우리 정서에도 절절히 와닿게 만들었다. 고수가 적절하게 추임새를 넣어가는 가운데 더해지는 피아노 소리는 정통 판소리가 낯선 관객도 공연을 무리 없이 관람할 수 있게 돕는다.


피아노가 음악적인 부분을 풍성하게 만든다면, 움직임 배우는 연극적인 요소로 재미를 더한다. 그는 소리꾼 옆에서 로즈의 남편이 되었다 자식이 되었다 하며 단조로울 수 있는 장면들을 지루할 틈 없이 메꾼다. 말과 소리로만 전하기가 밋밋한 부분에서는 몸을 적극적으로 쓰며 무대 전체를 활용한다. 정통 판소리에서 소리꾼이 몸짓으로 이야기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발림'의 역할을 뒷받침해주는 셈이다. 그 결과 우리는 무대 위에서 로즈의 다양한 삶의 순간을 생생하게 만난다.

 

 

[송보라] 소리극 로즈 이야기_셀렉본_ⓒ 제공 로즈이야기_촬영 김영도 (5).JPG

ⓒ 제공_로즈 이야기 / 촬영_김영도

 

 

제2차 세계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하면서 유대인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서 보통 전쟁이 끝나면 이야기도 끝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로즈 이야기>에서 로즈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때는 인생의 1/3 지점에 불과하다. 이때의 기억은 로즈에게 큰 상흔을 남겼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종전 후 난민이 되어 폴란드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그러다 다시 독일로 돌아와 떠돌던 로즈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정착한다. 결혼도 두 번이나 새로 하고 아이도 낳고 손주도 본다.

 

어떤 상처는 영영 지울 수 없지만 사람은 그 상처를 안고서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존재다. 로즈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지만 트라우마로 정의되는 인물은 아니다. 젊은 시절 사랑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이 빨개지고,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는 몸에 툴툴거리기도 하는, 넉살 좋은 할머니다. 그런 로즈가 늘어놓는 이야기 속에서 반복해 등장하는 것은 쉬바다. 로즈가 삶 속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마다 나오는 쉬바는 어느덧 인생의 자연스러운 한 관문처럼 느껴진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은, 이 공연 역시 로즈가 누군가의 쉬바를 하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든인 로즈는 또 누구의 쉬바를 하고 있었던 걸까?


로즈가 미국에 정착한 뒤로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 같은 굵직한 사건들은 삶의 배경처럼 지나간다. 미국에 살고 있는 동안 로즈의 삶은 그런 사건들에서 한 발짝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역사적 사건은 결코 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유대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키우고 싶었던 아들은 결국 뿌리를 찾겠다며 이스라엘행을 선택한다. 로즈는 아들 부부를 보러 이스라엘에 갔다가 팔레스타인 땅에 원래 살고 있던 이교도들의 눈 속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그 옛날 난민의 처지로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던 시절 대서양을 표류하던 배에 함께 타고 있던 유대인들의 눈에서 본 바로 그것이었다.


이야기는 그렇게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과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을 중심으로 이들이 자신의 역사와 뿌리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과, 그로 인해 심화되는 세대갈등까지 보여주며 현재에 이른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삶이 계속된다는 것.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똑같이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간이 흘러 여든이 된 로즈가 마주한 것은 이스라엘에 사는 자신의 손자가 팔레스타인의 어린 소녀를 총으로 쏘았다는 사실이다. 로즈는 오래 전 죽은 자신의 딸 또래였을 그 아이의 이름을 되내며 쉬바를 한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자신의 핏줄이 다른 민족에게 같은 폭력을 저지르는 지독한 현실에서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면서.



[송보라] 소리극 로즈 이야기_셀렉본_ⓒ 제공 로즈이야기_촬영 김영도 (8).JPG

ⓒ 제공_로즈 이야기 / 촬영_김영도

 

 

사람의 핏줄은 몸 안에 구불구불 얽혀 있지만, 그것을 다 펼치면 무려 지구의 1/4바퀴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사람의 삶에 얽힌 기억도 비슷할 것이다. 로즈가 2시간 동안 펼쳐 보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세계 근현대사와 그 속에서 끊이지 않는 증오와 착취의 연쇄를 발견한다. 로즈의 쉬바는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에 맞서는 나름대로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다. 개인을 집단의 일부로만 바라본 결과가 전쟁과 학살이라면 쉬바는 거기에 맞서 죽은 사람 한 명 한 명을 고유한 개인으로 기억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쉬바를 하는 로즈를 보며 마찬가지로 개인에 불과한 우리가 거대한 폭력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힌트를 얻는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최근에 가자 지구에서 사망한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외국 SNS 계정을 본 적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들을 위한 쉬바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이의 살아생전 웃는 사진과 함께 이름이 무엇이고 어떤 가족과 살았으며 무엇을 좋아했는지 기록해둔 것을 보면 지금 세계의 의도적인 무관심 속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지 선명하게 다가온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그 어떤 장르보다도 소리꾼 한 명의 목소리가 공연 전체를 끌고 가는 판소리가 쉬바에 잘 맞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소리는 그 목소리가 전하는 이야기만큼이나 고유하다. 목소리가 내는 길을 따라가본다. 거기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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