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가>¹ 는 중국의 고전 『삼국지연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한국적 정서와 민중의 시각을 녹여내 단순 ‘복원극’이 아닌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적벽대전’이라는 유명한 전쟁을 두고 중국 영웅들의 거대한 서사를 빌려왔지만, 그 이면에 가려진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자 했다.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음은 물론이고 해학까지 버무려내었기 때문에 <적벽가>는 번역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각색한 작품의 대표격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전쟁의 참상 속에서 드러나는 군사들(약자들)의 구체적인 고통과 권력자에 대한 풍자와 조롱, 그리고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들을 완화하는 판소리 특유의 서사 기법이 눈에 띄었다. 더불어 젠더 부분에서 역시 <적벽가>는 생각할 부분이 많아 작품 자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았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군사들의 설움’과 ‘군사 점고’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는 영웅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 전쟁의 실질적인 피해자인 이름 없는 군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점에 있어서 무척 와닿았다. 부모, 처자식과 생이별하며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담아낸다거나, 가난하고 고된 삶의 애환,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좌절된 개인적인 욕망(첫날밤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다 같은)에 이르기까지, 군사들이 가진 고통은 정말 예측 불허의, 각양각색으로 펼쳐지는 구체적이고 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연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적벽대전’이라는 거대 서사에 ‘군사 설움’이라는 미시 서사를 끼워 넣는 방식은, 때로는 거대 담론에 가로막혀 무시되기 쉬운 약자들의 고통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그렇기에 아마도 당대 청중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전쟁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녹여냄으로써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이 주는 참혹성에 대해 알리고 수용층의 의식을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장치로 기능했을 것이다. <적벽가>가 영웅담의 나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민중들의 서사도 포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인기 있고 생명력 있는 판소리 또는 판소리계 소설로 남게 하는 동력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 다음으로는 조조를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주목해 보고 싶은데, 조조는 작품의 중심 악역이라고 볼 수 있다. <적벽가>에서 조조는 간웅으로서 부정적인 면모가 강조되고 적벽대전에서 패배 후 도망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희화화되고 조롱당한다. 특히,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군사들이 조조에게 불평하거나 대드는 장면은 무려 83만 대군을 이끌고 있던 그의 권위를 바닥으로 추락시켜 버린다. 감히 일개 군사가 한 나라의 수장이자 대군의 장수를 조롱하고 항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 장면을 향유층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까닭은 작품 초반부터 조조가 오만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는 지도자로 그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판소리계 소설이 향유되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방만해진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수탈이 심해지던 시기였기에, 이러한 조선 사회의 봉건적 권위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과 비판적 인식이 있었을 것이고,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 감히 표출하기 어려웠던 불만을 해학적으로 드러내는 통로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감히, 하지만 공공연히 비판하고 조롱하는 모습은 일종의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적 위계 전복’을 통해 청중에게 통쾌함과 대리 만족같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조조를 우스꽝스러운 악인으로 그림으로써, 그의 몰락을 지켜보는 향유층의 심리적 부담을 덜고 비판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적벽가>는 공명의 화공으로 군사들이 타죽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기에,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한 장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를 향유층들이 감당할 수 있도록 완화하는 서사 기법들이 있다고 보인다. 대표적으로 죽음의 방식을 리듬감 있게 열거하거나 빠른 아니리일 것으로 추정되는 방식으로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은,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표현되었다면 무척이나 공포스러웠을 느낌을 부드럽게 희석시킨다. 이는 마치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방식을 떠올리게 했는데, 우스꽝스럽게 장면 묘사를 해서 향유층이 그 장면에 감정적으로 완전히 몰입하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게 함으로써 연행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한다고 보았다. 특히 이런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방식으로 의성어와 의태어를 정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군사들의 대화나 조조의 수난 장면 등에서 나타나는 해학적 요소들은 비극적인 감정을 중화시키고 판소리 특유의 연희적 즐거움을 부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적벽대전’의 장면 그 자체는 실화적으로는 무척 비극적이고 끔찍하지만서도 그것이 지닌 폭력성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극적인 재미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¹ 최혜진 외 4, 「적벽가」, 『쉽게 풀어 쓴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 299-3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