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두꺼운 스웨터를 입기에는 조금 더운 날씨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에 드는 검은색 스웨터를 입고 집을 나섰다. 오늘처럼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운 날 가야 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이촌으로 향하는 길. 오늘은 다른 이들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그 가벼운 발걸음은 도착지가 가까워질수록 일종의 행렬이 되었고 우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 입구까지 도착하니 나무 아래 오밀조밀 심어진 꽃들, 강렬한 햇빛 그리고 들뜬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이 모든 분위기는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던 날과는 달랐다.
그날은 금방 비가 올 것처럼 어두웠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뉴스에서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유명인의 소식이 들렸다. 나는 처음으로 박물관의 건축 구조가 지나치게 넓은 하늘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 그것이 보기가 싫어 사유의 방 뒤편에 있는 의자에서 오랫동안 금동 장식을 보고 있었다. 꽤 오래 앉아 있었는데.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마 별로 영양가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세계문화관에 도착했다. 전시명은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의 소장품으로 꾸며진 이번 전시는 크게 <신화의 세계>, <인간의 세상> 그리고 <그림자의 제국>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먼저 <신화의 세계> 전시는 고대 인간에게 왜 신화가 필요했는지, 그들이 생각해 낸 신들은 어떤 모습인지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이 되었다.
신화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삶 자체였고 사람들은 일상의 모든 곳에 신화 속 이야기를 그려 넣었다. 도기와 토제 등잔, 기둥 장식, 큰 대리석 조각상과 작은 청동상, 유골함과 묘비 ···. 그들이 표현한 신은 질투하고, 분노하고, 욕망하고, 실패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시품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봤던 것은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를 위한 봉헌물로 신체의 부분을 본뜬 작은 조각들이었다.
나는 자신의 아픈 신체 부위를 진흙으로 된 모형으로 만들어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으로 가져가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것을 신에게 바치며 고통의 치유를 비는 그들의 마음을 느끼면서 동시에 다양한 신체 부위 조각들을 보는 것은 이상하면서도 은은한 괴로움을 주었다.
2부 <인간의 세상> 전시실로 넘어가면서 그리스에서 영향을 받은 다양한 로마시대의 조각상들을 볼 수 있었다.
로마의 조각상들은 그리스 조각에서 이상미를 빌려왔지만 훨씬 더 현실적이면서 서사적인 감각을 지닌 듯했다. 카이사르, 아리스토 텔레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우아한 귀부인···.
차가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로마 황제들과 귀족들 그리고 철학자의 초상은 인간의 자기 표상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 보였다.
모든 권위와 역사가 지나가고 남은 형상. 그 표면에서 이미 지나간 시간과 그 찰나를 물질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전달되었다. 그래서인지 창백한 대리석도 그저 차갑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프레스코화로 장식한 벽면을 따라 들어간 곳에는 마지막 전시인 <그림자의 세계>가 꾸며져 있었다. 고대 사람들은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이행하거나 전환된다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장에는 그러한 믿음이 녹아 있는 전시품들을 모아 두었다. 하데스의 문, 죽은 자가 남겨지는 자와 악수하는 모습, 월계수와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된 유골함, 에로스와 프시케가 그려진 석관···. 죽음이라는 주제로 묶인 전시품들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삶에 대한 이상한 감각이 느껴질 때쯤 내 눈에는 인상적인 묘비 하나가 들어왔다.
그것은 <체스를 잘 둔 자의 묘비>로 돌의 표면에는 체스를 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아래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보드게임의 고수 편히 잠드소서." 그 유쾌함에 웃음이 나오려던 순간, 머릿속에는 어떤 한 사람이 떠올랐다.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던 사람. 나는 갑자기 그 사람과 함께 그곳에서 <체스를 잘 둔 자의 묘비>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죽음을 보고 웃으며, 재잘거리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전시회장을 떠나는 모습을.
나는 치과 예약에 늦지 않기 위해 빠르게 전시회장을 빠져나왔고 방금 전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전시장에서 느꼈던 그 무엇은 언제나 전시장을 빠져나가면서 물에 씻겨나가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