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틔움.png

 


'틔움'이라는 단어는 무언가가 싹을 틔우듯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를 열어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의미처럼 아직 완전히 다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과 창조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장이 되어 주었다.

 

단순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자라나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는 이 전시는 시작과 성장의 순간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틔움'이라는 제목이 무척 잘 어울린다. 전시장을 채운 작품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감각을 틔워내고 있었고 관람자인 나 또한 그 속에서 사유의 씨앗을 심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MIA (이서연) - 작가의 작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평범한 일상의 한 조각에서 길어 올린 감정을 담은 책 형태의 작업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띄우는 편지처럼 구성된 이 책은 익숙한 공간과 사소한 순간들을 통해 우리 삶 속 사건들을 은유적으로 비추었다.

 

화려한 실내와 대비되는 창밖의 회색 하늘,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흔들림의 장면들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감정의 밀도를 담아내는 구조처럼 느껴졌다. 눈앞의 이미지를 넘기는 행위 자체가 곧 서사를 따라가는 경험이 되었고 감각은 책이라는 형식과 맞물려 깊은 여운을 남겼다.

 


[크기변환]a.jpg

 

 

나른 (장의신) - 평소 SNS를 통해 익숙하게 접해왔던 터라 전시장에서 마주한 순간 더욱 반갑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색감, 섬세한 선으로 표현된 인물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을 놓이게 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작가 특유의 감정선이 깊이 배어 있었다.

 

‘적막’, ‘다정함’ 같은 작품은 사랑의 복합적인 감정을 조용히 풀어내면서도 그 안에 깃든 외로움과 안정을 동시에 전달한다. 작가의 일러스트는 단순히 예쁜 그림체를 넘어 사랑이라는 감정의 결을 찬찬히 되짚고 이해하게 만든다. 반복해서 보고 싶은 장면, 곁에 오래 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 작품들이었다.

 


[크기변환]d.jpg

 

 

대성 (정주희) - 작품은 처음 마주했을 때 예상과는 다른 인상을 주었다. 전시 전 자료로 접했던 디지털 일러스트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 마주한 작품들은 더 다양한 표현 방식이 담겨 있어 순간 다른 작가의 작업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특히 귀여운 토끼 캐릭터가 단순한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성장 배경과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설명을 듣고 다시 마주한 작품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열어주었고 그 안에 담긴 유머와 풍자가 더 명확히 읽히기 시작했다. 작가의 작업은 일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불편한 현실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풀어내며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상상력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또 어떻게 풀어낼지 기대하게 되었다.

 


[크기변환]e.jpg

 

 

유사사 (오예찬) - 작가의 작업은 그 자체로도 섬세했지만 함께 전시된 작업 노트를 통해 작품의 감정적 결이 더욱 깊게 전해졌다. ‘내가 딱 알맞게 차오른 순간’, ‘아늘아늘한 찰랑거림'이라는 표현은 언어로 다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순간을 정확하게 붙잡는 듯했고 그 표현이 고스란히 시각 이미지 속에서도 느껴졌다.

 

일상에서 스쳐 지나갈 법한 감정의 잔물결들을 펜 드로잉과 섬세한 질감의 종이 위에 구체화하는 방식은 무채색이 주는 차분함 속에서도 묘한 울림을 남겼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이 그림이라는 형태로 아주 조용히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작품과 작가의 언어가 함께 전시된 방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단순한 감상이 아닌 직접 경험하는 듯한 몰입감 있는 성찰을 가능하게 했고 일상 속 감정이 어떻게 예술로 틔워질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크기변환]b.jpg

 

 

은유 (박가은) - 작가의 작품은 처음엔 어두운 색채와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잔잔한 슬픔을 불러일으켰지만 작가의 설명을 통해 그 감정의 흐름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조화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침잠하는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하고 어딘가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그림 곳곳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처럼 우울과 불안이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며 그것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표현했다는 점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듯한 태도는 치유적이었고 설명을 듣고 나니 단순히 어두운 그림이 아니라 감정의 층위를 따라 나아가는 여정으로 보였다.

 

은유 작가의 세계는 내면의 고통을 조용히 조명하면서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빛을 향해 움직이려는 의지를 담고 있어 여운이 깊었다.

 

‘틔움’ 전시는 각기 다른 작가들이 제시하는 시선과 방식 속에서 감상자의 주체적인 해석을 유도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품들은 특정한 메시지를 강요하기보다는 감정과 기억, 경험의 조각들을 시각화하여 관람자가 스스로 연결하고 의미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작품뿐 아니라 작업노트, 설치 형식, 책의 구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관람자에게 능동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겼고 그 과정 속에서 ‘예술은 감정을 어떻게 틔워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했다. 전시는 봄의 시작처럼 미세한 떨림을 남기며 감정과 생각이 다시 자라날 수 있는 작은 틈을 열어주었다.

 

 

 

컬쳐리스트.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