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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왜 학교에서는 감정에 대해 가르치지 않을까? 감정은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는 존재다. 많이들 인생의 의미이자 목표로 삼는 '행복'마저 감정의 한 종류인 만큼, 감정이 삶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모르고, 때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특히 불안, 우울,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나 역시 그런 감정들이 슬금슬금 다가올 때면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외면하다가, 결국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진 감정에 휩쓸려버리기 일쑤였다.


다른 그 어떤 감정보다 내 안에 유난히 오래 머무르며, 나를 뒤흔드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제는 외면하지 않고 잘 다스리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챙김에 관해 알아보다가 운 좋게 아트퍼스트를 알게 됐다. 아트퍼스트는 사단법인 '오늘은'에서 진행하는 문화예술을 통해 청년의 마음 챙김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글쓰기, 연극, 미술, 사진 등 여러 문화예술을 통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안전한 공간 안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정서적인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수업을 여러 개 운영하고 있다. 그중 내가 신청해 들었던 수업은 '돌파하는 감정쓰기(영화&재즈)'였다. 수업의 소개문에 적혀있던 '다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고, 나의 세계에 대해 씁니다. 특히 나의 감정을 중심으로 불편, 불행, 분노에 대해 씁니다.'라는 말이 글쓰기를 통해 내 감정과 마음을 다스리고 싶었던 나에게 그 어떤 것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두 달 간 매주 화요일 저녁, 일을 마치고 수업을 듣기 위해 이대역으로 향했다. 분명 설레는 마음도 있긴 했지만, 사실 초반엔 두려운 마음이 더 컸었다. 나는 내 진짜 속마음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털어놓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때로는 일기장에 쓰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그런데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말해야 한다니. 사실 내 안에 해소되지 못하고 잔뜩 엉켜있는 고민과 불안을 털어놓으면, 그게 나의 약점이 되어 언젠가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운 마음이 존재했었다.  나조차도 모르겠는 내 마음을 쉽게 이해받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어 입을 꾹 닫는 편을 택했었다.


수업 초반에는 나도 모르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보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나를 의식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강사님이 시키는 과제를 하다 보니 점점 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꽁꽁 감춰놨던 내 진짜 감정과 아픔을 꺼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구든지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강사님이 세심히 배려해 주고 계시는 게 느껴졌고, 같이 수업을 듣고 있는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걸 알게 되면서 그 공간이 점점 더 편해졌기 때문이다. 

 

'돌파하는 감정쓰기' 수업을 통해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적어가며 나의 꿈과 욕망에 대해 알아갔고, 내가 불편하고 분노를 느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런 감정을 느꼈을 때 내 몸은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아픔을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꼭 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고 나면 홀가분한 마음보단 괜히 어딘가 찝찝하고 후회되는 마음이 좀 더 컸는데, 모두가 서로를 위하는 안정적인 공간에서 계속 내 속마음을 말하다보니 불편한 느낌이 많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특히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일은 내가 겪은 고민과 감정이 이상하거나 유별나지 않다는 걸 알게 해줘 그 자체로 위로가 되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게 조금 자연스러워질 무렵, 어느새 '돌파하는 감정쓰기' 수업의 하이라이트인 낭독회를 앞두게 되었다. 낭독회는 '우리의 감정을 진실로 선언할 수 있다면'이라는 주제로 각자 쓴 글을 앞에 나와 읽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다가 그 당시 내가 느끼고 있던 감정인 '분노'에 대한 글을 썼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슬픔의 또 다른 이름, 분노>

 

얼마 전,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화를 내본 적 있어? 아니 화가 나기는 해?”

그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었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고,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란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렇다. 나는 그 순간 화가 났었다. 난데없이 왜 화가 나는지도 모른 채 순간의 내 감정을 외면하며, “당연히 나도 화가 나지. 그런데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몰라 그냥 속으로 삭히는 것 같아.”라고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때의 나는 내게 질문을 한 그 사람에게 화가 났던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화났던 대상은 누군가와 갈등을 빚게 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언제나 가장 만만한 나를 탓하며 괴롭히곤 했던 나 자신이었다. ‘너는 화를 내본 적 있어? 아니 화가 나기는 해?’라는 질문은 모든 게 다 괜찮은 척 웃어넘기거나 혹은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미워하는 걸 선택하곤 했던 나를 꽤 깊숙하게, 아프게 찔렀던 것이다.


사실 수업을 들으면서도 나에게 화가 났던 적이 있었다. 나를 한 주간 분노하게 만든 것을 돌아보고 그것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시원하게 욕도 하면서 자기 안에 쌓인 화를 표출하는 것 같은데, 나는 내 안에 축적된 분노를 밖으로 드러내는 게 꼭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감정을 돌파하기는커녕 밖으로 드러내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싶어 답답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나에게 화내고 있었던 날 알아차리자 어쩌면 오랫동안 나와 함께했던 막연한 슬픔은 사실 분노라는 이름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불처럼 거셌던 분노는 내 안에서 끝없이 번져만 갔고, 그걸 유일하게 잠재울 수 있었던 나는 모든 걸 빠른 속도로 불태우는 분노를 바라보는 대신, 그것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 까만 재가 되어 남겨진 나의 일부분만 넋 놓고 바라봤었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는 무시한 채 검게 타서 남겨진 흔적만이 내 감정의 전부인 것 마냥.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한 분노를 마주하는 과정은 혼란스러웠고 불편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제야 내 감정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준 것 같아 후련하기도 했다.


아직도 나는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게 어렵다. 모두가 나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은 유쾌하고 단순한 사람으로 봐줬으면 싶다가도, 또 한 편으로는 내 안에 오래 고여있는 슬픔과 쓸쓸함을 발견하고 알아차려 주길 바라는 모순 안에서 언제나 갈팡질팡 헤매고 있다.

어쩌면 이 시간 이후에도 내 감정을 마주하고 드러내기보다 늘 그랬듯 모든 화살을 나에게 돌리며 또 스스로 괴롭힐지 모른다. 그래도 용기 내어 이 자리에서 선언하고 싶다. 앞으로 나는 익숙하고 편하다는 이유로 지금껏 방치해 왔던 나를 향한 오랜 분노를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응시할 것이다. 상대방을 미워하기보다 이해하려고 애쓰느라 돌보지 못했던 나를 이제는 우선으로 두고 싶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글들은 막연하고 흐릿한 나의 감정과 생각을 언어를 통해 구체화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이었다면, 이 글은 오랜 시간 내 안에 고여있던 것들을 받아 적는 것에 가까웠다. 그만큼 나의 가장 내밀하고 연약한 부분을 내어놓아서일까. 웬만한 발표와 면접엔 면역이 생겨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잘 떨지 않는 나도 이 글을 낭독할 때만큼은 손이 덜덜 떨렸었다. 그때의 낭독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주셨는데, 괜히 민망해서 오랫동안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문득 생각이 나 용기를 내어 영상을 틀어보게 됐다.

 

그 안에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천천히 글을 읽어 나가는 5개월 전의 내가 있었다. 영상 속 내 모습을 보는 게 쑥스러워 앞으로 조금씩 넘기며 보다가 영상이 끝날 무렵, 낭독을 마치며 활짝 웃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낭독을 마치고 나서 민망하고 멋쩍은 마음을 감추려고 일부러 더 활짝 웃은 거라는 걸 아는데도, 시간이 지나 그때의 나를 다시 보니 어딘가 후련하고 개운해 보였다. 그 모습이 좋아 괜히 몇 번이고 돌려봤었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분명 어렵고 많은 용기를 내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내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건 나약한 내 자신을 들키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더 많은 위로와 공감을 얻으며 그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내 감정을 진실로 선언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감정이 나를 짓누르는 짐이 아닌 내가 나로서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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