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은 (꽤 긴 시간 동안 진행됨에도) 순간적이다. 그렇기에 공연을 감상한 것에 대한 기억은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공연에 대한 순간적인 인상이 지속될 수 있도록 기억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던 중, 우연히 히사이시 조와 요로 다케시 간의 대담을 엮은 책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를 접하면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책은 아니기에 부담 없이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다. 따라서 이번 글은 마티스 피카드 트리오 첫 내한공연 감상에 대한 단상을 이 책과 함께 다뤄보고자 한다.
사실 나는 말의 언어가 없는 음악 공연을 보러 갔을 때(ex. 클래식, 재즈 등) 좋게 말하면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심상을 떠올리는 편이고,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소위 딴 생각을 주로 하는 편이다. 말이 있는 음악을 들으면 멜로디에 따른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음악을 감상하지만, 말이 없는 음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내 머릿속에 어떤 심상이곤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마티스 피카드 트리오의 연주를 감상하던 도중 떠오른 생각은 무엇이었느냐 함은, 바로 '마티스 피카드라는 사람이 작곡하여 이 트리오가 연주하고 있는 지금의 음악들은 어떠한 필연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일까?' 였다. 필연성이라는 단어가 담긴 이 생각은 이후 읽은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에서 히사이시 조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일주일 전 공연에서 느꼈던 과거의 인상을 현재의 시점에서 좀 더 제련된 단어를 찾아 정돈된 문장으로 표현해본 것이다.
필연성이라는 단어가 너무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히사이시 조의 표현에 따라 '규칙'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히사이시 조에 따르면, 어떤 곡을 쓰기 시작할 때 모티프든 리듬이든 그 곡의 핵심이 되는 요소를 정한 순간, 그곳에는 규칙이 생겨난다. 나아가 그는 작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내린다. 작곡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대로 곡을 써야 할지 아니면 전체의 구성을 생각하며 모티프를 변주할 지 사이를 고민하면서 서로 반대되는 행위를 긴장 가운데 수행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와 함께 대담을 진행한 요로 다케시의 표현도 또한 인상 깊다. 즉,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의 비유를 들며, 그들이 어느 지점까지 쓰고 나면 주인공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때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것의 의미는 하늘의 계시로부터 마치 신적 영감을 가지고 쓴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의 이 인물이라면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겠다는 필연적인 흐름이 생겨난다는 것을 뜻한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종다양한 예술 장르 중에서도 음악을 가장 좋아하지만,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 익숙한 사람이다 보니 소위 음악 자체에 몸을 맡겨 그것을 몸소 체험하는 사람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연주되고 있는 것에 대해 분석해서 결론을 내려고 하는 습성이 강하다. 이에 따라 마티스 피카드 트리오의 공연에 대한 나의 '생각'과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를 종합해보자면, 글을 쓰는 것과 음악 작곡/연주는 그것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 상당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나의 잠정적 결론이다. 여기서, 꼭 글쓰기와 음악 작곡/연주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 창작 활동 전반이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게 익숙한 글쓰기와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천착하여 다루고자 하고, 또 다분히 흥미지향성인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나는 글을 쓸 때 허구의 이야기를 쓰지는 않지만, 그 글의 마무리 혹은 결말을 정해두지 않고 쓰는 편이다. 요로 다케시의 말처럼 글 쓰는 작업에도 우연적인 리듬이 있어서 결론을 너무 미리 정해놓고 쓰다 보면 글을 유려하게 쓰는 것이 되려 어려워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그 끝을 열어놓고 글의 조각들을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전부 기록해본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한눈에 보면서 리듬 혹은 흐름을 발견하게 되면 다시 그 흐름에 따라 조각들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살을 붙여 글을 정돈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체 글을 다시 소리 내어 읽어봄으로써 비문을 점검한다.
그런데, 음악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작곡/연주 모두 그 끝을 정해두고 창작하거나 연주할 수도 있지만, 마티스 피카드의 작곡 그리고 그 트리오의 연주는 작곡 그리고 연주하는 과정의 리듬에 온전히 '몰입'함으로써 마치 그 고유의 규칙과 필연성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재즈 장르라고 하면 막연히 규칙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을 것 같지만, 그 고유의 흐름 혹은 논리가 있다는 점에서 재즈 또한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현재 우리는 충분히 좋은 음향에 기반을 둔 공연 실황을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또 여전히 공연을 보러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고 시간을 내어 공연장에 가서 그 현장을 즐기곤 한다. 내 손안의 작은 핸드폰으로도 그들의 음악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연주 현장을 직접 들으러 가는 이유는 완전한 몰입의 상태를 통해 섬세하게 구축된 그만의 음악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기 위함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음악을 '직접'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