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사건에서 피해자가 된 이들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때, 그 소식이 잠잠해지면 문득 그들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지 궁금해한 적은 있지만, 가해자의 삶을 궁금해한 적은 없다. 늘 시선을 주고 관심을 받아야 할 주체는 언제나 피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견고딕걸>은 다른 연극과 달리 참신하게도 가해자의 가족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의 일상과 삶을 조명한다.
극의 핵심 인물인 ‘수민’은 새까만 고딕 룩과 메이크업으로 자신을 숨기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의 쌍둥이 동생이 참혹한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의 목숨까지 끊어버리며 그들 가족의 삶도 하루아침에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유명 강사였던 엄마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아빠는 침묵 속에서 표정을 굳힌 채 살아간다. 수민은 다니던 학교를 떠나고 은둔한다. 모두가 거대한 싱크홀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가해자가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도 자살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건도 공소권 종결로 끝이 난다. 남겨진 피해자 가족은 울부짖는다. 연극에서 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화면에 나오는 그들의 인터뷰 내용, “우리는 가슴에 대못이 박혀서 살 수가 없어요.”.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사과하러 오지도 않았다고요.”라는 문장은 그들이 얼마나 참혹한 세상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허우적거리는지를 보여준다.
가족 중 일부가 저지른 범죄를 함께 책임지는 건 법적으로는 비합리적이다. 범죄자의 가족도 사회구성원인데 이들을 배척한다는 것은 사회 원칙에 어긋날뿐더러 그들에게 씌우는 낙인과 차별은 또 다른 피해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의 비합리성과 도덕적∙윤리적 책임은 다르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윤리와 도덕을 배제하면 세상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법과 정의는 때때로 어긋나기 마련이고, ‘무엇이 정당하냐’의 문제와 ‘그 무엇에 대해 할 말이 있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반성과 책임이 없는 행동은 사건의 회피와 자기방어적 생존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견고딕걸>은 가해자의 가족이 책임을 지는 저마다의 방식을 전개하며 극을 이끌어나간다. 엄마는 동생이 그럴 애가 아니라며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고는 살인의 이유를 단지 동생이 정신적으로 아픈 아이였다고 매듭짓는다. 아빠는 침묵과 회피로 상황을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피해자 가족에게 사과하러 가겠다는 수민의 행동을 엄마는 말린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다만 이 극은 수민이 엄마의 그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전개된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극에서 매우 중요한 요점으로 작용한다.
한 개인의 윤리적 각성과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피해자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겠다는 용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대로 사과를 한다고 받아 줄 거라는 보장도 없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그 시도가 남겨진 이들을 싱크홀에서 구해줄 명분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싱크홀에 빠진 이들은 뜻하지 않은 고통과 책임을 마주한 가해자 가족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영문도 모르고 소중한 사람을 잃은 고통을 얻은 피해자 가족도 있다.
이 연극은 단순하지 않다. 가볍고 쉬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도 않고 책임과 도덕의 무게, 남겨진 이들의 삶 전반을 비추며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뜻하지 않은 상황에 던져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삶을 어떻게 회복하고자 애쓰는지, 그들 각자의 선택은 삶에 어떠한 결과와 여운을 남기는지를 모두 알아볼 수 있다.
연극이 생소하면서도 참신하다고 느껴진 이유는 남겨진 이들의 초점을 피해자 가족이 아닌 가해자 가족에게 맞추었기 때문이다. 만약 피해자 가족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해나갔다면 지금과 같은 여러 방면에서의 고민이 필요 없다. 모두의 공감을 받기도 쉽고 도덕적, 법적으로도 그들은 잘못한 점 하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자의 가족은 다르다. 하루아침에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 된다.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고 일상적인 삶을 이어나가기도 힘들어진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위치가 한순간에 모호해지는 것이다.
이들이 피해자의 가족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극복해내고 계속 이어지는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서 이들은 어떤 방식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연극은 도덕적으로 심오한 문제의식을 던지며 관객이라면 이 사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되묻는다.
연극의 중간에서 수민은 소리친다. “내 삶도 소중해!”. 연극의 말미에서 엄마는 수민에게 묻는다. “내가 수빈이(쌍둥이 동생)를 다시 그리워해도 될까?” 이 모든 것은 극의 마지막 수민이 피해자의 가족에게 사과하러 달려가며 마무리된다. 그렇게 극은 끝나버렸기에 이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피해자 가족에게 사과한다고 쉽게 받아줬을 리도 없고 모두가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되돌아가기까지는 생각한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비극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지만, 그 삶은 결코 온전할 수 없음을 시사하며 그렇게 무너져버린 삶을 어떻게 메꿔나갈지를 관객은 숙고한다.
참혹한 일이 있고 난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도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에 관객으로서도 쉽게 입을 열기가 어렵다. 처음에는 우리 모두가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에서 시작한 삶이 예기치 않은 불행으로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들이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고통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고, 이는 침묵과 회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연극은 그들의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삶을 따라가며 우리가 쉽게 외면해온, 어쩌면 쳐다보려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고통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고통을 넘어설 순 없다. 그들이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그 시작은 피해자의 눈물과 상처에 응답하는 일이어야 한다. 고통이 고통을 덮는 방식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이 될 때 우리는 다시 살아갈 수 있다. 누군가의 상처를 마주할 때 견고딕의 굳은 마음이 녹기 시작하는 것처럼,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