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사이트 제1회 기획전 [틔움]을 방문한 날에는 비가 적잖이 내렸다.
으레 온 동네가 북적거리기 마련인 주말 오후의 성수동에 예기치 않게 다소 간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다 보니 약간은 감상적인 기분으로 전시장을 찾았다.
크지 않은 전시 공간의 문을 여는 지점에는 이번 전시의 제목인 '틔움'의 명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았을 때 그 본질이 '틔움'이라고 명명된 이유, 그 명분을 담백하게 적어낸 글이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전시의 첫 번째 구역은 연인 간의 찰나의 순간, 그리고 그 관계에서 느끼는 이름 없는 마음을 그려낸 일러스트레이터 나른의 직관적인 그림과, 일러스트레이터 은유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몽환적이고 아련한 그림이 채웠다. 본 전시 안에서 작품의 크기나 컬러감에서는 유사하다는 감상을 받게 되는 구역이었는데, 그럼에도 한 쪽은 강렬할 만큼 직관적이고, 다른 한 쪽은 의뭉스러울 만큼 은유적이라 대조되는 것이 인상 깊었다.
[탐욕], 대성
두 번째 구역으로 넘어가면 일러스트레이터 대성의 단순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일러스트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비틀거나 과장된 일상의 모습이 다소 징그럽다고 느끼면서도, 그 일상의 바탕이 되는 감정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재치 있는 필선으로 담아낸 작품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위 사진의 '탐욕' 같은 작품은 그 발상과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북 아티스트 Mia의 경우, 파랑 일색의 작품들이 흰 벽과 대비를 이루어 시선을 사로잡고, 프렌치 도어 구조로 제작된 책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차가운 색인데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따스함이 느껴지는 파란색이라, 그 앞에서 괜히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벤치, 슬픔에 관하여], Mia
[나는 이제], Mia
여기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책 '벤치, 슬픔에 관하여'와 그림 '나는 이제'였다.
이 두 작품 모두 보는 사람이 직접 의미를 찾도록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는데, '벤치'에서는 독자가 동사와 단어/문장을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는 자유를, '나는 이제'에서는 그림과 그림 사이의 시간을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남겼다는 점에서 작가의 개성이 느껴졌다.
[몽상가의 정원], 유사사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일러스트레이터 유사사의 공간에서는 이름 붙일 수도, 형태를 상상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 작가의 사유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지시적인 비유, 객관적인 상징 없이 자유롭게 형상화한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 그림이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이전에 스스로 기록하고 그래서 보존하기 위한 것이기에 유의미하다는 점이었다.
예술 작품에서 작가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혹자는 작가의 존재가 너무 크고 깊게 다가올 때 부담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나 역시 가끔 그랬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유사사의 공간은 작가의 고민, 노력이 비중 있게 느껴지기에 더 와닿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전시의 한 쪽에 작가의 작업 노트가 비치되어 있는 것이 더 센스 있는 선택이라고 느껴졌다.
전시 공간을 채운 다섯 작가의 작품에는 실상 공통점이랄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작품을 모두 둘러보고 시작 지점의 소개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모두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가들이 그려낸 다양한 감정에는 거창한 이름도, 자세한 설명도 없다. 그저 그 감정을 유심히 들여다본 작가의 시선이 무겁게 느껴질 뿐이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는 고유한 방식으로 그 감정을 틔워내는 작가들과, 그 공간에 함께함으로써 또 다른 감정을 틔워내는 관람객들이 각자의 '틔움'을 실현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
개성 있는 작가들의 좋은 작품을 보는 재미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을 한 공간 속에서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하는 힘은 바로 이 주제를 끌어내는 흐름에 있었고, 그것이 이번 기획전의 백미였다.
다음 아트인사이트 기획전의 주제는 무엇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순간이었다.
굿즈를 판매하는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마음이 이끌리는 문장을 고르고 당신을 위한 작품을 만나보세요"라는 안내와 함께 다양한 문장이 적힌 카드가 비치되어 있었다. 일행과 함께 끌리는 문장이 적힌 카드를 뽑고 뒷면을 보니 그 문장에 해당하는 전시의 그림이 있었다.
뽑았던 카드가 원래도 맘에 든 유사사 작가의 그림이었던지라, 운명이다 싶어 바로 북마크까지 기념으로 구입했다. 전시를 마무리하고 기념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주는 바람직한 기획에 박수를 보내며, 아트인사이트의 제2회 기획전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