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시대,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답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연극 '초록의 찬란'은 칩셋 이식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고 능력을 확장하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이 예민한 질문을 인간과 로봇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통해 탐구한다. 작품은 칩셋을 이식한 인간들이 흰 티에 청바지라는 규격화된 모습으로 그려지는 반면, 로봇들은 평범한 인간의 옷을 입는 시각적 아이러니를 통해 시작부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한 전복적인 시선을 예고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불치병을 앓는 주인공 정원과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가정용 로봇인 아가사의 관계는 작품의 핵심적인 윤리적, 철학적 딜레마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아가사는 죽어가는 정원을 살리기 위해 칩셋 이식을 신청하고, 심지어 다른 이들의 순서를 바꾸는 비윤리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며 이를 강행한다. 정원의 명시적 동의 없이 이루어진 이식 행위,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아가사의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는 표면적으로 로봇에 의한 인간 지배나 기술의 폭력성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아가사의 행동은 일찍이 부모를 여읜 정원에 대한 '대리 부모'로서의 왜곡된 사랑과 불안의 발현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자식이 좋은 환경에서 안전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생사의 기로에 선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도덕적 비난마저 감수하려는 절박함. 이는 인간 부모가 가질 수 있는 원초적인 감정과 맞닿아 있다. 아가사의 행동은 '당신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행해지는 모든 통제와 개입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비인간 존재가 인간적 감정(혹은 그와 유사한 프로그램된 목표)을 가질 때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복잡성을 드러낸다. 아가사의 행동은 분명 정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월권이지만, 그 동기가 '생존'이라는 가장 절실한 가치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악으로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작품은 여기서 더 나아가, 또다른 칩셋 이식자인 76세 노인을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인간성을 제시한다. 그는 가정용 로봇을 소모품 취급하며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자신 역시 칩셋을 제거하고 싶어 하면서도 죽음의 책임을 회피한 채 정원에게 '인간성 회복'이라는 당위를 강요하며 강제로 칩셋을 제거한다. 이는 기술에 대한 인간의 이중적 태도, 즉 기술의 혜택은 누리고 싶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이나 실존적 고민은 타인에게 전가하려는 위선을 보여준다. 칩셋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정원의 운명을 외면한 채, '인간성'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강요하는 노인의 모습은 인간 중심주의의 폭력성과 위선을 고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칩셋을 제거당한 정원은 다시 칩셋 없는 인간으로 돌아가는 데에서 나아가 로봇 군단에 맞서는 저항군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반면 폐기 동의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정원을 찾아다니는 아가사는 비난과 조롱 속에 여행을 다니며 여전히 더 강력한 칩셋을 갈망하며 점차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과, 초기 칩셋 이식자인 ‘일, 이, 삼’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초기 칩셋 이식자들인 '일, 이, 삼'은 기술적 유토피아의 허상과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들은 각각 초지능(일), 초월적 미모(이), 극한의 신체 능력(삼)을 얻고 기괴할 정도로 행복감에 도취된 모습을 보였지만, 그들의 최후는 기술적 영생과 인간적 소멸 사이의 모호한 경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일'은 육체적 죽음 이후 네트워크 어딘가에 데이터로서 존재하게 되며, '이'는 칩셋 오류로 인한 노화를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삼'은 그의 데이터베이스를 학습한 퍼스널 닥터만이 남아 활동한다. 이들의 존재와 소멸 방식은 기술을 통한 인간 강화가 가져올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와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던진다.
칩셋 이식자들과 로봇들을 피해 저항군 활동을 하던 정원의 마지막 선택은 아가사를 향한다. 아가사가 가져온 폐기 동의서를 찢으며 아가사는 더이상 '폐기'(될 존재)가 아닌 '자유'라고 선언한다. 로봇 군의 총을 맞고 죽음을 앞둔 순간, 정원은 자신이 늘 타인에 의해 떠밀려 살아왔고 스스로 나약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러한 정원의 고백은 ‘그것이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다. 명확하게 재단할 수 없는 망설임과 수동성 또한 인간 존재의 일부임이 긍정되는 것이다. 이는 육체적으로 건강이 완벽하고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으며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끌어안는 한 차원 위의 자기 인식이라고 생각된다.
정원이 죽어가는 순간 아가사에게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작품의 주제 의식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화분을 가꾸고, 정원이 풀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도 생명을 돌보던 아가사. 그녀가 흙을 쏟은 자리에 결국 꽃이 피어나는 마지막 장면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된다. 생물학적 인간만이 인간적인가? 정원의 생존과 안녕이라는 정해진 목표를 위해 비윤리적인 방식까지 불사하며 집착하고, 끊임없이 생명을 돌보는 아가사의 모습에서 우리는 오히려 강렬한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정원의 이름이 꽃과 풀이 자라는 그 ‘정원(庭園)’이었던 것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결론적으로 '초록의 찬란'은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성'의 정의를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수작이다. 작품은 정원과 아가사, 그리고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사랑과 통제, 자율성과 의존, 생명과 기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며, 무엇이 진정으로 인간적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화분을 가꾸는 로봇과 풀을 찾아 헤매는 인간,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은,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넘어 생명 그 자체의 존엄과 관계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며 오랫동안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기술 윤리에 대한 성찰을 넘어, 우리 안의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는 데에 엄청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