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시간이 이상하게 흐른다.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도 마찬가지다. 올해 70세를 맞은 춘자씨는 몸은 그대로인 채 돌연 아이가 되고,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고군분투와 그녀의 상상 속 세계가 펼져진다.
지난 2월 6일부터 더줌아트센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 속 주인공의 이야기다. 이 공연은 치매를 주제로 가족들 간의 우애와 추억 그리고 기억을 잃고 아이가 되어가는 한 노인의 내면을 공들여 표현해낸다.
작품 속 가족들은 치매 초기로 선망 증세가 나타나고 있는 고춘자씨를 데리고 고기 뷔페 ‘소, 원하는 대로 다 돼지’를 방문하지만 고춘자씨는 테이블에 놓인 불을 보고 놀라 ‘실례’를 해버리고 가족들이 뒷처리를 하느라 한눈을 판 사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고깃집 사장은 고춘자씨가 벌인 소동으로 인해 언쟁을 벌이던 중 그녀가 어린시절 초등학교 앞에서 추억의 ‘진수성찬 떡볶이’를 운영하던 사장님이었다는 걸 알고 밀키트 사업을 제안하지만 고춘자씨는 어느새 근방을 떠나 사라진 뒤였다. 당신을 걱정해서라도, 밀키트 사업을 위해서라도 얼른 고춘자씨를 찾아야하는 가족들은 그녀의 행적을 뒤쫓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그녀의 뒤를 쫓으며 뒤엉키는 가족들의 서사와 치매 증상이 심해지는 과정을 다양한 환상으로 표현한 고춘자씨의 서사가 함께 진행된다. 두 서사가 진행되며 어우러지는 방식은 독특하다. 특히 이 작품에는 수많은 장르의 음악이 차용됐으며 음악마다 다른 분위기로 극을 이끌어간다.
전형적인 뮤지컬 음악은 물론 락, 트로트, 보사노바를 비롯한 여러 음악과 연출이 한 무대에서 실험된다. 그러다보니 각기 다른 톤을 가진 씬들이 한 작품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대 곳곳을 메우고 있는 화려한 네온사인의 간판들과도 비슷했다. 이 뮤지컬은 작은 무대에서 공연이 진행되다 보니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한 장소를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간판을 무대 위에 나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다양한 분위기와 공간을 표현한 이 같은 방식은 다채로움이라는 분명한 장점이 있었으나 위험 부담도 공존하는 듯 보였다. 하나의 공연 안에서 여러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만큼 필연적으로 특정 부분 혹은 일부 연출에서는 위화감이나 (취향에 따른)아쉬움을 경험할 수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무대 장치의 경우에도 소규모 무대에서 효율적으로 다양한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다소 빈약하게 느껴지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제한된 동선과 소품의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배우들은 더 많이 춤추고 노래하고 몸짓을 과장해야 했다.
그럼에도 작품 내내 존재하는 재치와 작품을 이끌어가는 발랄함이 서로 다른 느낌을 가진 씬들을 하나의 공연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훌륭히 봉합해냈다고 느꼈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현상을 현대무용에 가까운 춤이나 물고기, 똥파리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활용해 표현한 것도 의미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한두 사람의 아이코닉한 배우와 연기, 노래에 의존하기보단 모든 배우들의 연기와 하모니가 조화롭게 이루어져 잘 짜여진 공연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배우들은 한정된 환경 안에서도 배역과 역할을 바꿔가며 고군분투하며 이야기를 채워갔다.
하지만 아쉬움도 비슷한 지점에 있었다. 개인적인 감상이겠으나 일부 장면들은 유치하거나 난해했으며 반응하기 어려운 텐션의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모임 자리에서 누군가 재미없는 농담을 던진 것만 같은, 어색하고 반응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일부 이어졌다. 하지만 필자가 난색을 표하며 앉아있던 중에도 누군가는 웃음을 지었으므로 그것은 아마 호불호나 취향에 영역에 불과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의 톤과 연출이 변주됨에 따라 새로움과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많았지만 그만큼 모든 관객들의 모든 니즈를 충족시키기에는 그 궤도를 이탈하는 장면들이 존재하는 듯 보였다. 앞서 웃음을 짓던 누군가도 또다른 장면에서는 웃음 없이 그 장면을 지켜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힘은 여기에 있다. 배우들이 그 다양한 장면들을 설득해내기 때문이다.
지극히 취향의 영역에서 감상을 밝히자면 필자는 물고기가 나오는 일부 장면들이 난해하게 느껴졌다. 붉은 물고기 분장을 하고 과장된 몸짓과 현대무용에 가까운 오묘한 움직임으로 말 사이사이 요상한 효과음을 끼워넣는 배우의 모습을 보면서 직관적인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치매 증상이 심해지며 소변에 이어 대변까지 제대로 가리지 못하게 되고 더 심한 환상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장면에서도 아이디어와 연출은 좋았으나, 똥을 언급하며 일차원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은 유머코드에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그것을 밀고가며 공연을 이어가는 힘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은 어떤 장면에서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고 끝까지 흔들림 없는 연기를 보여줬다.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합당한 이유와 근거를 들어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이야기하면 존중하고 받아들이게 되듯이 이 공연에는 작품을 설득해내는 힘이 있었다. 개인적인 취향에 맞지 않았던 물고기와 똥파리 장면은 ‘치매에 걸린 고춘자씨가 증세가 심해진다는 단순한 사실’을 극에 맞게 해석해 창의적으로 풀어낸 장치였으며 극의 전체적인 진행도 배우들이 주어진 환경 안에서 보다 자유롭고 다채롭게 작품을 구성해내기 위한 시도가 녹아있었다고 느껴졌다.
서사는 특별하진 않아도 적절한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고 마무리까지 재치있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공연장 밖을 나오면 실제 극에서 판매하게 된 고춘자 할머니 특급 레시피의 ‘진수성찬 떡볶이’밀키트를 팔고 있는 점도 즐거움을 줬다.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오는 6월 1일까지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