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영어가 필수다. 고등학교까지 다닌다면 12년까지도 영어를 배우는 셈이다. 오로지 수능을 위해서. 안타깝게도 나는 이 긴 교육 기간 동안 한 번도 높은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때 영어 교과 선생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에 매번 질문을 받아 주실 정도였다. 영어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정말 배우고 싶은 언어였다. 국어와 다른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우리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현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암기에 크게 공들이는 능력이 부족했던 학생 시절에는 암기법을 잘 활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EBS 수능특강에 나오는 지문을 통째로 외우는 게 겁이 났다.
수능 공부를 한 사람은 대부분 이 ‘통짜 암기’를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난 이걸 제대로 해낸 적이 없었다. 외우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한된 시간 내에 그 지문들을 외우고 분석하는 이유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몇 문단 뒤 바뀌는 지문을 읽는 것보다 다른 언어권과 소통하는 게 언어 아닌가하는 반항적인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고서는 영어가 내게 맞지 않는 언어라는 생각이 깊이 자리했다. 그렇게 쭉 담을 쌓을 거라 생각했고, 이 생각에 꽤 오랫동안 슬퍼했다. 영어는 취업을 위해 억지로 해야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으로.
그러다 이번 달에,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어 회화 스터디 게시물을 보았다. 그건 지금까지 질리도록 배우고 어려워했던 수능형 영어와는 달랐다. 실생활에서 응용할 수 있는 대화체를 포함해 비즈니스 상황에서도 발화할 수 있는 회화를 공부할 수 있는 스터디였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며 뒹굴거리던 나는 이 게시물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매력적인 것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가격이었다. 성인이 영어 학원을 다니거나 집에서 비대면 강의를 듣는 것은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해도 꽤 많은 돈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스터디는 훨씬 저렴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당장 스터디에 가입했다.
스터디는 게시물에 적힌 대로였다. 정말 간단하게 한 페이지 정도의 리딩을 하고 격일로 작문한 녹음본까지 제출하는 게 전부였다. 심지어 초급자를 배려해 난이도 조절을 직접 할 수 있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20분 정도면 끝날 양이었다지만, 욕심이 났다. 왜 여기서는 이런 표현을 쓰는 걸까, 혹은 왜 이런 강조세로 발음하는 걸까 따지며 하나하나 발음을 따라 적기도 했다.
스터디를 한 지 나흘이 지났다. 나는 간단한 20분짜리 숙제를 매일 두 시간씩 공부하고 있다. 당장 큰 변화를 느낄 수는 없다. 당연한 것이었고, 약속된 한 달의 스터디가 끝나더라도 내가 꾸준히 공부하지 않는 이상 크게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영어를 특히 못해 열 배의 시간이 걸리는 내 공부였지만, 욕심이 난 뒤엔 즐거웠다. 2년 전 대학교 교양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여러분, 영어를 배우세요. 반 년이라도 배우면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고작 나흘째지만, 그 말의 의미를 조금 알 것도 같다.
처음으로 숙제 녹음본을 보낸 날이 기억난다. 내가 이런 문장을 뱉을 수 있다고. 이렇게 긴 문장들을 연음으로 내뱉고, 또 자연스러운 억양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벅찼다. 좋은 발음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성장을 느껴 친구에게 녹음본을 보내 뿌듯한 마음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제 나는 이십 대 후반이 되었고, 한국 사회의 흐름에 맞추자면 나는 ‘결혼을 고민할 나이’나 ‘취직하고 돈을 열심히 모을 나이’가 되었다. 그렇기에 더욱 ‘시도하기 어려운’ 때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대학에서의 나는 스물다섯이 넘으면 볼품없어진다는 의미의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말을 들었다. 일했던 출판사에서는 ‘그렇게 말을 잘 들어야 시집 가서 남편에게 잘하지’ 편견 섞인 말을 듣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를 했던 데선 여자인 내게만 옷차림 규정이 생기는 등 잘못된 시선에 심신이 지치기도 했다.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편협적이고 사회적인 분위기의 ‘때’에 ‘나’를 맞추지 말 것. 그 사회가 항상 평균적이거나 진실일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영어가 어렵지만 점점 공부하는 시간이 즐거워지고, 비슷한 표현을 더 찾아보는 기쁨을 배웠다. 더 나아가, 나는 내 하루를 온전히 느끼는 방식을 배우고 있다. 내 일상 속 패턴을 벗어나 새벽까지 책을 읽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내 삶이 지루하고 내일 눈을 뜨기 싫다면, 정말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고민했으면 한다. 그게 정말 내가 선택한 삶인지. 미디어에 노출된 것처럼 출퇴근 시간에 책을 읽거나 퇴근 후 헬스장에 꼭 들르는 등 노력을 크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나를 알고 배우며 보듬어주는 게 중요하다. 나에게는 늘 내 편인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