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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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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영화 <바람이 분다>의 

줄거리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실제로 감상할 때 보는 이미지와 보고 난 후 기억되는 이미지 사이 간극이 존재한다. 활발한 굿즈 사업의 영향일까? 지브리 영화라는 키워드를 던져주면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이나 생명력 있는 색감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영화는 이 '지브리 감성'에 결코 압도될 수 없는 거대한 내러티브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렇게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의 세계관을 배타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이도록 두지 않고 현실 세계의 편린을 담고 이로써 관객에게 세계의 모순과 비극을 깨닫게 만든다.

 

영화를 감상한 직후 분명 환상적인 작품을 본 것 같은데 알쏭달쏭한 기분을 느낀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어린 시절 환상을 지켜주던 보호막이 걷히고 실제 세계의 여러 면면을 목격하며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영화 속 메타포와 설정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된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영화에 담은 반전주의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반성 등과 같은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느끼게 되면 작품을 들뜬 마음으로만 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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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영화에서 직관적인 방식으로만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의 영화는 관객과 항상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지브리의 세계가 간직한 신비를 지켜낸다. 때로는 그런 방식이 누군가를 분노하게 하더라도 말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지루하며 논리적인 스토리라인은 창의성을 해친다고 NHK 방송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한 바 있다. 관습을 깨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창작 신념이 고스란히 반영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바람이 분다>는 한국 관객의 비판을 야기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영화 <바람이 분다>는 전범국 일본의 위치를 피해국으로 프레이밍했다는 비판을 샀다. 몇 년 전, 호기심에 못 이겨 직접 찾아 본 <바람이 분다>는 그런 비판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름다운 세계 속 실존하는 비극을 발견하면서 민족적 트라우마를 넘어 전쟁의 비극을 대하는 태도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화 같은 화풍과 사랑의 서사를 빌어 전쟁 시기 일본에 대한 연민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반드시 다시 한 번 보고 감상을 나누어야 할 지브리의 영화를 하나만 꼽으라면 <바람이 분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시대의 비극은 개인의 삶에 전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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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는 전투기 제로센을 만든 실존했던 항공기 설계사 '지로'의 이야기로, 세계대전 당시 항공기 설계사의 꿈을 펼친 그의 삶을 그린다. 비행기를 띄운다는 꿈은 전쟁 시기였기에 특히 그 쓸모를 주목받고 추진력을 얻는 특권을 누렸지만, 그는 그것을 위해 삶의 다른 행복을 희생해야 했다. 그것은 시대와 국가가 그에게 영광이라는 한때의 트로피를 쥐어주는 대신 빼앗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품고 있던 비행기에 관한 강한 열망을 지로는 실현한다. 적보다 하루라도 빨리 전투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부의 압박 속 그는 사랑하는 연인 '나호코'의 병세가 악화되는 와중에도 일에 매진한다.

 

처음으로 <바람이 분다>를 보았을 때는 지로가 꿈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인물로만 보였다. 두 번째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비행기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요구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빨리 꿈이 이뤄져야 그는 나호코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어린 시절의 지로가 직접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르는 꿈을 그린다. 그는 전투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 했다. 세상을 자유로이 누비는 그런 환상적인 교통수단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만약 그가 비행기의 꿈을 전쟁이 다 끝난 후에 꾸었다면 그는 저주받은 꿈을 꾸지 않았을 것이고 꿈 때문에 저주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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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제로의 꿈이 이뤄지는 과정은 다소 건조하게 묘사된다. 시간의 압박으로 초조함, 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에서 청춘은 삭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브리 영화라면 영화마다 꼭 한 번은 볼 수 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이빨을 보이며 호탕하게 웃는 장면은 <바람이 분다>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전투기가 날 수 있느냐 없느냐로 희비가 교차하는 와중에 전쟁 승리라는 일본의 꿈은 항공기 설계사들의 꿈으로 교묘하게 둔갑한다. 항공기 설계사들이 짊어진 무게에 비해서는 이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이들이 강요된 광기에 맞춰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내내 비춰지는 항공기 회사의 모습은 전쟁의 참상과 교차되지 않는다. 전쟁의 직접적인 비극과는 격리된 무기 공장의 내부처럼, 이들은 자신들의 연필과 자가 총이나 칼보다 위협적일 수 있다는 결과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관객이 전쟁의 참사와 결과를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보여주는 이 연출은 이들을 다소 기계적이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 의식 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지로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연필과 자를 손에서 계속 놓지 않는데 그럴수록 그의 꿈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열망이 부각된다. 그가 지닌 항공기를 향한 열정을 제외하면 지로는 지극히 평범한 남성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 전쟁이 얼마나 비대하고 비이성적인 욕망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더불어 그 욕망의 책임을 개인에게 어떻게 전가하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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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죄 또한 지로라는 개인에게 대속된다. 바다를 건너간 자신의 전투기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했듯 그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는 대가를 치른 것이다. 나호코의 병은 지로와 결혼하기 전부터 진행 중이었지만, 지로는 나호코와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을 대부분 전투기를 만드는 데 써버린다. 전쟁과 무관해 보이는 비극이어도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전쟁을 탓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호코의 죽음과 일본의 패망이라는 결과는 영화의 중반부 즈음 다소 확실한 방식으로 암시된다. 예상할 수 있는 결과를 바라보면서도 전쟁의 주체가 명령하지 않으면 꿈꾸기를 관두지 못하는 지로의 모습은 시대가 정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의 취약성과 나약함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서사가 그의 행동에 면죄부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가 꿈꾸는 비행기는 하얀 종이비행기를 연상케 하는 하얀 몸체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만든 비행기는 일본 국기의 문양을 단 전투기였다. 시대가 불러온 비극이라 해도, 결국에는 강요된 꿈이라 해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지로 자신이었다. 지로가 마지막 시퀀스에서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한 대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깊은 후회와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꿈이 이뤄진 후에야 그 꿈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실존했던 지로가 느꼈을 감정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감정을 지로에게 직접 부여함으로써 그 나름의 속죄를 하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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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 중 드물게 비극으로 막을 내린 영화다. 사실 영화의 끝에 지로에 대한 존경을 담았다는 글귀가 삽입되었기에 이런 영화의 결말만 보고 지로의 삶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기란 무척 어려웠다. 다만 지브리 작품답지 않게 몹시 정적이고 갑갑한 분위기 속에서 비극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가는 <바람이 분다>를 보고 남은 감상에서는 결국 부정적인 인식이 덜 우세했다. 지로의 삶의 공백 사이에 서사를 채워나가며 그를 캐릭터가 아닌 인간으로 그리려는 노력에서부터 이러한 소재를 다루는 일에 대한 감독의 심적 무게를느꼈기 때문이었다.

 

<바람이 분다>가 비판의 소지는 있을 지언정 자기연민에 빠진 영화는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폭력에 휩쓸려 개인의 꿈이 원형을 잃고 투명했던 색마저 군국주의에 오염되어 가는 비극은, 오히려 국가가 일으킨 전쟁이 얼마나 많은 국민들에게 비탄이라는 병을 퍼뜨리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쟁의 비극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행여 구국의 영웅으로 기록될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미지 출처: 스튜디오 지브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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