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철학자이자 문학 평론가, 시대의 이방인이자 너무 일찍 태어난 실험가라고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며 다소 낯설고, 의문이 많이 느껴졌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가다 보면, 얼마나 예민하게 세상을 감각하고, 얼마나 조용하게 내면을 파고들던 사람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이 책 《고독의 이야기들》은 그런 벤야민의 말 중에서도 가장 혼잣말 같은 글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쓴 것 같은 문장들을 모은 책이다.
무엇보다 제목의 ‘고독’이라는 단어가 이 책 전체의 분위기를 정확히 짚고 있다. 철저히 혼자인 상태에서만 마주칠 수 있는 감정들, 외로움과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평온,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순간들, 그런 것들이 벤야민의 문장 속에 몽글몽글 떠다닌다. 그걸 억지로 설명하지도 않고, 구조화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 감정들이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둔다.
읽는 사람도 자연히 이해보다는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글들이다.
1부: 꿈과 몽상 – 이미지로 흘러가는 글
첫 번째 장 ‘꿈과 몽상’은 가장 비논리적이고, 가장 자유로운 장이다. 구체적인 서사도 없고, 뚜렷한 주제도 없다. 오히려 그런 부재가 글의 분위기를 더 몽환적으로 만든다. 마치 자는 도중 문득 깨서 기억나는 꿈 한 자락을 적어둔 것 같은 문장들. 때론 흐릿하고, 때론 이상하게 선명한 장면들. 벤야민은 여기서 이성과 논리를 완전히 놓아버리고, 꿈과 상상이라는 세계에 자신을 완전히 맡긴다.
이 글들은 풍경처럼 흘러간다. 어떤 장면에서 출발해 전혀 다른 장면으로 스며드는 식. 그 전환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어디서부터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읽는 내내 “이게 무슨 뜻일까?”라는 질문보다는 “이 장면, 어쩐지 마음에 남는다”는 여운이 오래간다. 무엇보다 이 장엔 파울 클레의 삽화들이 함께 실려 있는데, 그 그림들이 글의 흐름을 붙잡아 주기도 하고, 오히려 글보다 먼저 시선을 끌며 하나의 장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글과 이미지가 서로 보완하면서,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감각을 채워주는 느낌이다.
2부: 여행 – 길 위에서 떠오른 사유의 조각들
두 번째 장 ‘여행’은 더 구체적인 장소들이 등장하지만, 여전히 이 책만의 특유의 분위기는 유지된다.
일반적인 여행기처럼 장소를 나열하거나 경험을 기록하는 식이 아니다. 벤야민에게 여행은 이동 그 자체보다는,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사유의 틈이다. 기차역 대합실에서, 도시의 거리에서, 배의 갑판에서—그는 스쳐가는 장면들을 붙잡고, 그 안에서 문득 고독해지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여행자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낯선 세계에 들어온 타자다. 벤야민은 그런 타자성, 익명성, 그리고 그로 인한 일종의 긴장을 아주 예민하게 포착한다. 도시의 소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이방인의 시선… 그런 것들을 하나의 철학적인 재료처럼 다루는 그의 시선이 꽤나 인상적이다.
여행은 그에게 단순한 풍경의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다시 묻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그는 자신이 만난 낯선 사람들, 고독한 여행자들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기록한다. 어떤 이는 고독 속에서 방황하고, 어떤 이는 그 고독을 누군가에게 나중에 들려줄 이야기로 바꾸려고 한다. 결국, 이 장은 외부 세계를 보는 이야기이면서도, 또다시 내면의 풍경으로 수렴된다.
3부: 놀이와 교육론 – 언어의 장난과 사유의 가능성
마지막 장 ‘놀이와 교육론’은 조금 더 특별하다. 철학자 벤야민이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쓴 글들인데, 단순한 교육론이라기보다는 언어와 감각, 상상력에 대한 글이다. 그는 아이들이 하는 말장난이나 언어놀이를 단순한 장난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엔 언어의 리듬, 물성, 그리고 창조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 본다.
아이들이 단어를 뒤틀고 바꿔 말하고, 새로운 말을 만들고, 이상한 조합을 해내는 순간, 거기엔 어른들이 잃어버린 감각이 살아 있다. 벤야민은 그 감각을 포착해 글로 옮긴다.
단어가 단어를 끌어당기고, 그 사이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와 이미지가 튀어나오는 순간들. 그는 유희 속에서 사고의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그 유희는 어떤 규범이나 체계가 아니라,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 세계다.
결국 이 장은 ‘놀이를 교육으로, 교육을 놀이로’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굉장히 현대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철학적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는 감각, 그것을 표현하는 글에서 리듬감이 느껴진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방식
이 책은 어쩌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하는 느낌이 든다. 감정, 기억, 꿈, 사유의 단편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은 그것들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의 조각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독자가 그 곁을 천천히 지나가게 만든다.
그래서 《고독의 이야기들》은 논리로 읽는 책이 아니라, 감각과 리듬으로 읽는 책이다. 글과 그림이 함께 있는 이 책은 일종의 ‘눈으로 읽는 꿈’ 같은 경험을 준다. 파울 클레의 삽화가 벤야민의 문장과 나란히 놓이며, 어느 쪽이 먼저 말을 걸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든다. 말의 끝에서 이미지가 시작되고, 이미지의 여백에서 다시 말이 나온다. 그렇게 한 사람의 내면 풍경을 천천히 산책하듯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독한 한 자락에 발을 담그게 된다.
《고독의 이야기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어딘가 낯설고 익숙하지 않을 때, 조용히 곁에 앉아주는 책이다. 말을 걸기보다는, 그냥 곁에 있어주는 책. 말 대신 풍경을 보여주고, 논리 대신 감정을 남긴다. 읽고 나면 뭔가를 ‘이해했다’기보다는, 어느 감정이 내 안에 잠시 머물다 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그 혼잣말의 틈새를 엿듣는 셈이다. 고독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은, 고독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닿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고독을 외롭지 않게 만들어주는 아주 조용한 동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