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단순한 공간의 설계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감성을 담아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며 다양한 공간을 경험하고 기록하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특히 현대 건축의 거장들이 설계한 여러 주택들을 방문하면서 공간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누군가의 집 탐방’이라 지었으며, 단순히 건축적 요소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공간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의 시각에서 바라본 다양한 디테일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탐방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위치한 손네벨트 하우스(Sonneveld House)다.
1933년에 지어진 손네벨트 하우스는 기능성과 미학을 동시에 담아낸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기능주의 건축물이다. 이곳은 단순한 주거 공간의 기능을 넘어, 건축이 어떻게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장소였다.
기능주의 건축이 구현된 생활 공간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 건축 5원칙이 반영된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기반으로 하며, 자유로운 평면 구성과 넓은 창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실내에서도 커튼과 슬라이딩 도어를 통해 공간을 유연하게 변형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생활 방식의 변화를 유도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가로로 긴 창을 통해 거실-식당-서재까지 밝은 빛이 한꺼번에 들어와 집 안 전체에 밝고 화사한 느낌을 주었으며, 기능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빛, 공기, 공간 세 가지 요소를 집안 곳곳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기능주의 건축은 단순히 미적인 측면을 넘어 사회적 개혁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0세기 초 유럽의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의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비좁고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며 기본적인 삶의 질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축주인 손네벨트는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고, 단순히 가족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하인들 또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손네벨트 하우스에서는 하인들을 위한 방이 0층(한국 기준 1층)에 넓고 쾌적하게 설계되었으며, 독립적인 화장실과 위생 시설까지 제공되었다. 처음에 설명 없이 하인의 공간에 들어갔을 때는 하인의 방인지 인지하지 못할 만큼 깔끔하고 쾌적함을 느꼈고, 공간을 통해 건축주의 진보적인 마인드를 엿볼 수 있었다.
디자인의 세밀한 접근
이 주택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디자인의 정교함이다. 손네벨트 하우스는 단순한 기능성을 넘어, 작은 디테일까지도 치밀하게 계획된 공간이다.
대표적인 예가 욕실이다. 세면대 위 비누 받침대나 타일 줄눈과 정확히 맞춘 세면대 선반 같은 디테일을 통해, 1930년대 주택 설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주거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디자인도 돋보인다. 손네벨트의 서재에 놓인 주황색 의자 중 머리 받침대가 있는 것은 남성용, 없는 것은 여성용으로, 이는 당시 올림 머리를 주로 하던 여성의 외적 특성을 고려해 디자인되었다. 이처럼 기능주의는 단순한 공간의 합리화에 머무르지 않고, 사용자에 맞춘 세밀한 설계로 확장되었다.
기능주의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가구와 오브제
손네벨트 하우스의 가구들 대부분은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디자인 브랜드인 Gispen에서 제작되었으며, 일부는 건축가가 직접 디자인했다.
이 집에는 현재와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을 특별한 시스템 가구가 있었는데, 바로 집 안 곳곳에 배치된 중앙 제어식 스피커다. 집 안의 모든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된 이 스피커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사례였다고 한다. 공간을 돌아다니는 동안 모든 방에서 동일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고, 100여 년 전 손네벨트 가족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 공간에는 공간과 잘 어울리는 네덜란드의 건축가가 설계한 Breakfast Service 컬렉션의 식기류가 놓여 있었고, 식탁보 역시 유명 텍스타일 디자이너의 작품이 함께 연출되어 있었다. 손네벨트 하우스는 가구와 오브제가 단순한 개별 요소가 아닌 전체 공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가구 디자인뿐 아니라 색채에 대해서도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공간에 어울리는 오브제의 색채와 질감은 전체 공간의 분위기를 극대화했으며, 이러한 색채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던 디자이너의 감각적인 안목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공간을 경험한다는 것
1930년대에 지어진 공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고 감각적인 손네벨트 하우스는 공간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좋은 디자인이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여전히 유효한 질문으로 던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아름다운 공간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여전히 영감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공간을 새롭게 꾸며나가고 있다. 손네벨트 하우스를 통해 좋은 디자인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