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늘어지다가도 단숨에 몰아치고, 불협화음을 내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러 악기가 조화를 이루고, 때론 아무도 모르는 길로 내달리는 즉흥연주까지 선보이는 음악. 이것이 바로 재즈다. 악보에 얽매이지 않는 재즈를 듣다 보면 우리가 사는 예측불허의 세상이 떠오른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는 유연한 변화가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재즈에서 삶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20년 가까이 재즈를 들어온 재즈 애호가이자 『재즈피플』의 고정 필진인 김민주 작가 역시 재즈는 어디에나 있으며 '재즈의 태도'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첫 책 『재즈의 계절』로 일상 속 재즈와의 만남을 소개한 그가 두 번째 책 『재즈가 너에게』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재즈 역사에서 잊히지 않는 12개의 라이브 콘서트와 함께다. 편지 형태로 전해지는 과거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위로를 건넨다. 지난 25일 만난 김민주 작가는 재즈에 틀린 음은 없다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말과 함께,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나누어줬다.
순간에 존재하는 재즈의 마법
두 번째 책 출간을 축하드려요. 이번 책은 어떻게 기획되었나요?
감사하게도 첫 책 『재즈의 계절』이 생각보다 많은 사랑을 받아서 두 번째 책을 쓸 용기를 얻었어요. 첫 책으로 재즈를 영화, 미술, 디자인, 경영학, 향수 등 다양한 분야와 연관 지어서 재즈를 모르는 분들에게 친근하게 재즈를 소개했다면, 두 번째 책에서는 재즈의 본질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재즈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라이브 콘서트를 중심으로 재즈 이야기를 풀어냈지요.
재즈의 본질을 이야기하기 위해 라이브 콘서트의 순간을 가져온 이유가 있나요?
모든 음악이 그렇지만 특히나 재즈는 즉흥 연주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라이브에 그 진가가 있어요. 저 역시 재즈 클럽에서 본 라이브 공연이 저의 첫 재즈 경험이라 재즈는 라이브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고요. 같은 뮤지션이 같은 타이틀로 하는 공연이라도 매 회차 연주가 달라요. 음반에서는 조용한 곡을 공연에서는 활기차게 연주하거나 그 반대일 때도 많죠. 재즈가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특별한 점입니다.
각 공연의 이야기는 1월부터 12월까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쓰여 있어요. 특정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쓰신 건지 궁금해요.
일관된 누군가가 있었던 건 아니고, 매달 다른 독자를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재즈의 계절』 행사에서 클래식과 재즈의 차이에 관심을 갖고 질문하셨던 분이 계셨는데, 2월 편지의 경우 그분이 본다고 생각하며 도입부에 그분의 질문을 언급하기도 했죠. 물론 아무한테나 바다에 유리병 띄워 보내듯 쓴 편지도 있습니다.
책에서 소개하신 12개의 라이브 콘서트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나요?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존재하는지가 중요했어요. 별다른 스토리 없이 음악과 연주가 훌륭했기에 재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게 된 공연이나 음반도 많아요. 그건 굳이 제가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냥 보고 들으면 돼요. 저는 단순히 어떤 음반이 좋다고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문제, 위기, 심지어는 싸움까지 있었던 공연들을 살폈고 그중에서도 재즈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12개를 추렸습니다.
책을 읽으며 소개해주신 음악을 함께 들었는데, 유독 재즈는 다른 장르보다 라이브 음반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았어요.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맞아요. 1920~60년대 재즈의 부흥과 녹음 기술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뉴욕의 대형 음반사의 주도하에 녹음 기술이 발전하고 스튜디오가 아니라 라이브를 전문으로 하는 엔지니어가 따로 등장했어요. 오늘날 유명한 녹음 엔지니어분들 중에는 이 시기부터 활동을 하신 경우도 많죠. 라이브에서 진가가 드러나는 재즈 뮤지션의 즉흥성과 뉴욕 음반산업의 니즈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가 수많은 라이브 음반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11월 편지 중에 델로니어스 몽크와 존 콜트레인의 50년 된 녹음 자료가 발견되어서 뒤늦게 음반으로 발매되었다는 일화가 생각나기도 해요.
재즈 쪽에는 그런 경우가 정말 많아요.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베니 굿맨의 라이브 음반 [The Famous 1938 Carnegie Hall Jazz Concert](1950, Columbia) 역시 베니 굿맨의 옷장 깊숙한 곳에서 잊혀 있다가 처제가 발견해 공연된 지 12년 만에 나온 것이죠.
일상에 스며드는 재즈
재즈를 20년 가까이 들어왔는데, 재즈의 무엇이 그렇게 작가님을 매료시켰나요?
10대 때는 인디밴드 공연을 보러 다닐 정도로 락 음악에 푹 빠져 있었는데, 대학생 때 여행을 가서 우연히 보게 된 재즈 공연이 제 음악 취향을 완전히 바꿔 놓았어요. 그 이후로는 질리지도 않고 계속 재즈만 듣게 되더라고요. 저랑 잘 맞는 음악이었던 것 같아요.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멋스러운, 친구 같은 음악이 제게는 재즈였어요. 재즈의 역사나 관련된 이야깃거리도 따로 공부를 한 것보다는 그냥 음악이 좋아서 듣다가 자연스레 하나둘 알게 된 것이 많아요.
재즈를 오랫동안 들으면서 재즈에 대한 느낌도 생각도 조금씩 달라졌을 것 같아요.
재즈가 자유롭고 즉흥적인 성격이 강하잖아요.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은연중에 재즈 뮤지션을 게으르고 자기 멋대로 사는 이미지로 생각했어요. 이제는 재즈의 자유로움이 엄청나게 오랜 수련 끝에 탄생한다는 걸 알죠. 재즈 뮤지션은 음악을 위해서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스스로를 엄격하게 훈련시킨다는 것도요. 무대 뒤의 노력을 알게 되니 재즈라는 장르에 존경심과 경외심이 생깁니다.
작가님의 일상에서 재즈의 정신이나 태도가 도움이 될 때 또는 영향을 미칠 때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계획이 안 돼 있으면 불안해하는 성격인데, 재즈를 들으며 계획에서 좀 벗어나도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길렀어요. 영상 일을 하다 보면 촬영 현장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많이 생겨요. 그럴 때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에 틀린 음이란 없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죠. 틀린 건 없고, 다음에 어떤 음을 연주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요. 그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에 당황해하는 대신에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어요.
재즈가 일이 되기도 하면서 재즈를 듣는 방식에 변화가 생기기도 했나요?
재즈가 망망대해처럼 넓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구석구석 탐험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는 몇 개의 섬만 돌며 수영하는 스타일이죠. 그런데 일을 하면 신보를 듣고 글을 쓸 일이 많아서 자연스레 평소에 잘 듣지 않는 결의 재즈를 듣게 됩니다. 그럼 또 색다른 곳에 여행 간 느낌이라 좋더라고요.
한국대중음악상 재즈 분야 선정위원으로 일할 때는 누군가의 수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니 책임감이 막중한데, 덕분에 국내 재즈 뮤지션 음악을 정말 진지하게 듣게 돼요. 평소에는 저도 모르게 미국이나 유럽의 재즈만 듣게 되는 경향이 있거든요. 일 덕분에 국내 재즈도 다양하게 듣게 됩니다.
‘좋아하는 몇 개의 섬’은 어떤 음악인지도 궁금해요. 특별히 좋아하는 악기가 있는지도요.
키스 자렛과 마일스 데이비스를 특히 좋아하고, 두 사람이 활동했던 시대의 음악을 자주 듣습니다. 그리고 ECM이라는 재즈 음반사에서 추천하는 음악이 취향에 잘 맞아서 여기서 권하는 음반은 거의 다 즐겨 들어요. 상황별로 즐겨 듣는 음반도 있는데, 예를 들어 글을 쓸 때는 키스 자렛 & 찰리 헤이든의 [Jasmine](2010, ECM)이, 드라이브를 할 때는 팻 메시니 & 찰리 헤이든의 [Beyond the Missouri Sky](1997, Verve)가 좋더라고요.
악기는 확실히 피아노를 좋아해요. 보컬이 있는 쪽과 없는 쪽 중에서는 망설임 없이 없는 쪽이요. 둘 다 좋아하지만, 연주곡을 더 즐겨 듣습니다.
최근에 빠진 재즈 뮤지션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파키스탄의 여성 뮤지션 아루즈 아프타브(Arooj Aftab)에게 푹 빠져 있어요. 컨템포러리 재즈의 비전을 굉장히 잘 보여주는 뮤지션이에요. 방금 보컬 없는 쪽을 더 선호한다고 말해놓고 보컬이 있는 음반을 추천하게 되네요. (웃음) 목소리를 악기처럼 다루시는 분이라 더 많이 듣게 되는 듯해요. 최근에 그래미상 시상식에서는 파키스탄 뮤지션 최초로 공연을 하실 정도로 동시대 힙한 뮤지션 중 하나입니다. 특히 [Night Reign](2024, Verve)을 좋아하는데, 몰입을 도와주는 앨범입니다.
자기만의 ‘재즈 섬’을 찾는 즐거운 여정
이 책을 읽고 재즈에 관심이 생기는 독자도 많을 듯한데, 재즈에 입문하기 좋은 경로가 있나요?
재즈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음악은 일단 그냥 들으면 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재즈 뮤지션들도 재즈가 뭐냐고 물어보면 명확한 답을 하기보다 나도 모르니 그냥 들으라고 하는 경우가 많고요. (웃음) 한번 자기 취향에 맞는 ‘섬’을 찾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그 섬을 중심으로 다양한 뮤지션을 탐험하는 게 재미있거든요.
그래도 입문 경로를 추천하자면, 이미 유명하고 인기도 많은 음반 위주로 들어보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많이 듣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빌 에반스 트리오의 [Waltz for Debby](1962, Riverside)와 쳇 베이커의 [Chet Baker Sings](1954, Pacific Jazz)가 대표적이죠.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 ‘Misty’도 잘 알려진 재즈 입문곡입니다.
정말 제대로 된 경로로, 단숨에 ‘재즈의 정수’를 만나보고 싶다면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라는 음반을 추천드립니다. 쿨재즈, 모달재즈, 퓨전재즈를 선보이며 재즈의 역사를 계속 혁신했던 뮤지션의 대표적인 음반이에요. 평론가들과 재즈 뮤지션들에게 재즈 역사에서 중요한 앨범을 꼽으라고 하면 늘 1위에 랭크되죠.
책 뒤편에는 재즈 거장들이 재즈에 대해 했던 말들이 부록으로 담겨 있어요. 그중 작가님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앞서 말씀드렸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에는 틀린 음이 없다. 잘못된 자리에 음들이 있을 뿐이다”를 좋아하고, 제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이에요. 재즈 음악의 정의로는 키스 자렛의 “재즈란 왔다가 사라진다. 그저 일어날 뿐이다. 거기에 함께 있어야 한다. 그게 전부다.”를 좋아해요. 재즈를 너무 잘 설명하는 말이거든요. 실제로 키스 자렛은 본인의 즉흥 연주를 악보로 만드는 걸 싫어했대요. 오직 공연에만 존재해야 하는 재즈의 순간이 있다고 믿었던 거죠.
공연에 갈 때마다 그 말을 실감해요. 이 음악은 지금 이 현장에만 존재하는구나 하고요. 공연을 보고 나오면 내가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것을 무언가를 보고 나왔다는 생각에 애틋함이 생기죠. 희귀한 동물과 갑자기 마주쳤다가 헤어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못 가는 공연을 보면 안달이 나요. 거기에서 뭐가 왔다가 사라졌을까 궁금해요.
그럼 과거의 공연 중 딱 하나를 현장에서 볼 수 있다면요?
1월 편지에 소개했던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요. 그 공연이 담긴 [더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1975, ECM)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했어요. 아무 정보 없이 표지가 예뻐서 샀는데 듣자마자 펑펑 울었죠. 감정을 뒤흔들더라고요. 그게 처음부터 끝까지 즉흥 연주였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였어요. 음반을 들으며 이 공연이 열렸던 때에 제가 살아 있지 않았다는 게 너무 아쉽더라고요. 함께 녹음된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실제로 이 공연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음 책이 나온다면 그때는 어떤 이야기를 더 하고 싶으세요?
소설이든 영화든 재즈로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래서 만약에 세 번째 재즈 책이 나온다면 재즈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위플래쉬>나 일본 애니메이션 <자이언트 블루>의 이야기처럼요. 최근에 브라질 보사노바 황금기를 배경으로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 아주 재미있게 봤는데, 저도 그런 이야기를 꿈꿔요.
마지막으로 이 책의 독자분들한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첫 책을 내고 독자들을 만나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재즈를 잘 몰라도 금방 좋아하게 된다는 걸 느꼈어요. 저도 은근히 재즈가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그러니 재즈가 처음이라면, 새로운 나라에 여행을 간 느낌으로 가볍게 들어보시기를 추천드려요. 낯선 나라에 갔을 때 아는 게 별로 없는데 그래서 오히려 신나고 설레잖아요. 그렇게 재즈의 세계로 한 발을 떼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골목길을 기웃거리며 자기만의 추억을 만들고, 내가 즐겨 찾는 섬도 발견해 보시기를 바라요.
*사진제공: 김민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