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정말 놀라운 공연을 봤다.
별다른 정보도 기대도 없이 판소리 뮤지컬이라는 새로움에 혹해 보게된 것 치고 평일 저녁이 일순 충만해졌다. 전시를 봐도, 공연을 봐도 언제나 내용 보다는 예술의 언어에 더욱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 나로서 적벽은 차린게 너무 많아, 배부른 공연이었다. 2017년 초연 후 올해 6연을 맞이했다고 하니, 그동안의 노하우와 한 차례 더 새로워진 퍼포먼스 덕분인 듯하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도착한 정동극장, 어딜 앉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무대, 막이 올라가는 동시에에 꽉 들어차는 사운드. 얼마 전 뮤지컬 총연출을 만나 ‘비단 공연 뿐만 아니라 극장 입장 부터 관객 경험이 시작된다.’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본격적인 극이 시작하기도 전의 설렘이 두배로 다가왔다.
본 공연은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적벽대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 삼국지를 알지 못하더라도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최고의 지략가 제갈공명을 향한 삼고초려 등 한국인에게 관용적인 표현이 하나의 챕터로 이루어져 금세 몰입할 수 있다.
물론, 주요 스토리가 창과 아니리로 전달되기 때문에 (즉각적인 이해가 어려울 수 있으므로) 삼국지의 내용을 숙지하고 오는 편이 연출과 퍼포먼스에 집중하기 용이하다.
시놉시스
위, 한, 오 삼국이 분립하고 황금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난무한 한나라 말 무렵.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권좌를 차지한 조조에 대항할 계략을 찾기 위해 제갈공명을 찾아가 삼고초려 한다.
한편 오나라 주유는 조조를 멸하게 할 화공(火攻) 전술을 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데, 때마침 그를 찾아온 책사 공명이 놀랍게도 동남풍을 불어오게 한다.
이를 빌어 주유는 화공 전술로 조조군에 맹공을 퍼붓고, 조조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적벽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백만군을 잃고 도망가는 조조를 가로 막는 것은….
사실 의아하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고수의 역할이 현대적으로 확장된 '라이브 세션' 이었다.
북과 드럼세트, 징, 거문고와 전통 관악기까지 합심해 만들어내는 풍성한 사운드가, 무척이나 피로했던 하루 끝 판소리가 자장가로 들리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날려보냈다. 장면의 성격을 명확화하는데 집중하고 완급 조절과 이질적인 일부 넘버들을 다듬는 과정을 거쳐서인지 '범 내려온다' 차용, 힙합스러운 편곡도 악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앎이 짧아 길게 언급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국악시간 마다 틀어달라고 졸랐던 프로젝트 락 뮤직비디오 '난감하네'의 2025년 버전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드럼 연주자 분의 들썩이는 어깨가 내적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번 <적벽> 또 하나의 특징인 젠더프리 캐스팅은 판소리가 원래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공연된다는 특성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내가 관람한 회차에서는 조조 역을 이승희 배우님, 유비 역을 정지혜 배우님이 연기하셨다. 두 분 모두 여성 배우였고, 애정하는 캐릭터인 조자룡 역도 여성 배우가 분했다.
공연을 보면서는 캐릭터의 분위기에 맞게 성별을 나누어 찰떡 같이 캐스팅 했구나, (삼국지에서 묘사되는 인물의 특징을 생각하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했는데 조조와 유비역에는 남자 배우분들이 더블 캐스팅 되었음을 알고, 캐스팅에서의 유연함이 극을 더 재미있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의상과 소품이 대사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의 전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치가 되어 주었다.
이번 공연에 앞서 의상은 간결한 현대적 미감을 보여온 기본 의상에 갑옷의 형상화와 부분적 해체를 통한 디자인 요소를 추가했고, 양면 주름치마 등 의상의 움직임과 공간감을 개선한 구성으로 배우들이 표현하는 움직임의 역동성 연출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전통 판소리에서 소리꾼이 손에 든 부채가 <적벽>에서는 단순한 소품을 넘어 전투 장면에서는 무기의 역할을, 감정선을 강조하는 순간에는 배우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부채의 색을 달리한 것으로 조조의 군, 유비의 군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연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부채를 활용한 군무 장면에서는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도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졌는데 이런 위용은 한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 관람객들의 뇌리에 깊게 박혔으리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렇게 변화를 거듭한다면 7연으로 돌아왔을 때 또 한번 보고 싶을 것 같다. 공연을 볼 때 박수 칠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알고 먼저 신호를 주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분들도 아마 적벽의 N차 관람객이지 않을까.
<적벽>과 함께 전통 콘텐츠의 저변이 날로 넓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