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이 선보여지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관 1실에서는, 그림을 통해 자유롭고 혁신적인 목소리를 내었던 오스트리아의 화가들을 조명했다. 대표적인 미술가로서 <키스>라는 대작을 남긴 구스타프 클림트. 빈 분리파의 초대 회장으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일처럼, 그가 전시의 시작을 알렸다.
이때 빈 분리파란, 1897년에 결성된 예술 단체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예술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적인 의미를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당시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모두 비엔나에 모이곤 했는데, 빈 분리파는 깊어진 예술 분야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반(反) 움직임인 것이다.
특히, 비엔나 1900년대는 그 자체로도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사이에 있는 하나의 사조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시기인데, 실제로 클림트의 그림 중 일부에는 여러 인상파 미술가들의 색채와 표현법이 담겨있기도 하다.
구스타프 클림트, <모자를 쓴 여인>
다양한 영역에서
빈 분리파 회원들은 예술의 범주를 미술로만 정하지 않았다. 다양한 미술작품과 더불어 포스터, 잡지, 공예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잡지 <성스러운 봄> 창간호에서는 다양한 영역 (회화, 조각, 건축)이 이어져 뿌리에 다다르는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분리파의 새로운 이상향을 담았다. 5/6호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제1회 전시회에서 활용되었던 포스터 이미지를 기반으로 디자인됐다. 이때, 아테네의 영웅이자 분리파를 뜻하는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찌르는 고대 신화의 인물을 활용해 당찬 도약이 담긴 소망을 표현했다.
오스트리아 예술가연합,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 5/6호
다양한 공예품들도 ‘총체 예술’로서 전시되어 있다. 총체 예술이란, 단 하나의 예술품이 아닌, 다양한 조각이 모여 조화로운 예술을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의자, 테이블, 벽지, 화병, 가방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공예품들에 제약을 두지 않으면서 한 공간 안에 간결하면서도 기하학적인 예술품을 창출해내기도 했다.
특히, 요제프 호프만은 ‘정사각형’을 떠올릴 수 있는 공예품을 선보였다. 클림트도 마찬가지로 풍경화를 그릴 때 우주를 바라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정사각형의 크기를 빌렸다. 도형이 주는 완전함과 영원함을 닮은 작품을 꿈꾸며 활동을 이어갔던 두 사람의 모습이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제프 호프만, 꽃장식 테이블, M436번
새로운 표현 방법으로
구스타프 클림트, 그리고 요제프 호프만의 활동에 이어 젊은 작가들도 분리파에 입성했다. 한스 뵐러, 오스카 코코슈카, 막스 오펜하이머 등 비엔나의 한 세기와 표현주의를 열었던 화가들의 작품도 여럿 만나볼 수 있다.
이들 중 대표적인 화가는 바로 ‘에곤 실레’. 그는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으로 이름을 알렸다. 빈 미술학교에 입학해 뛰어난 드로잉 실력을 뽐내곤 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로부터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기존 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등 여성의 몸을 아름다운 곡선으로 표현한 것과 달리, 그의 누드화는 다소 투박한 질감과 선으로 표현됐다.
평소 그런 장르를 그려왔던 그에게서 비평가들은 ‘아름다움’보단 ‘에로틱’함에 초점을 맞추었고, 에곤 실레라는 화가 자체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에곤 실레,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
그가 누드화를 주로 그렸던 이유는 자라온 환경에 있다. 아버지가 문란한 성생활로 성병 매독에 걸려 돌아가시자, 그는 슬픔과 그리움이라는 감정과 함께 인간의 욕구, 본성, 내면을 여과 없이 그림으로 드러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는 어두운 색채로 표현한 불안함, 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나는 우울감 등 다양한 감정이 솔직하고 투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자유롭고 소신있는 목소리를 더해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실제로 20살이 넘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동료이자 친구로 친하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사람이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빈 분리파에서 활발한 활동을 토대로 계몽적인 하나의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불안정한 시기를 거쳐 안정적인 삶에 다다르게 된 에곤 실레가 사회적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묵묵히 누드화로 인간이라는 본성을 채색한 것처럼, 클림트 또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몇몇 그림이 퇴폐적이라는 비판을 받고서도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1900년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가 유럽의 예술 도시로 급부상했던 시기였다. 시내 건축물들을 짓고 비난을 받기를 반복할 무렵, 한 세기의 변화임과 동시에 지금의 비엔나가 시작되기 위한 첫 걸음이었기에 혼동과 격동이 난재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은 클림트와 에곤 실레, 그리고 당차고도 자유로운 목소리를 낸 수많은 빈의 예술가들을 가만히 조명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비엔나가, 모더니즘이 생길 수 있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 슬로건을 내세웠던 1900년대 비엔나의 다양한 예술가들. 당시 도전이자 혁신으로 여겨졌던 움직임들이 현 시점, 어떤 이유에서든 새로운 챕터로 열렸다. 그들이 세상에 내고자 했던 목소리처럼, 미술과 예술의 세계는 오래토록 변화에 변화를 거듭할 것이다. 기존의 것에서 멈추지 않고 늘 새로워지기 위해 움직일 것이며, 가고자 하는 길에는 자유롭고 소신있는 발걸음을 내딛자고 말하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