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그저 이름만 차가울 뿐 뜨거운 이념의 대립이 극렬한 상황 속에서, 미국과 소련은 서로에 대한 견제 속에서 비롯된 무수한 기술의 발전을 앞다퉈 만들어낸다. 그에 따라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게 되고,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만들어낸 스푸트니크 2호의 발사까지 성공하여 이내 미국에 대한 자신들의 우위를 확실히 점하고자 한다. 그런데, 스푸트니크 1호와 달리 2호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탑승시키기로 한다. 왜 인간이 아니라 '생명체'인가? 그것은 그 당시 급격한 사회변화 가운데 서둘러 개발된 기술로는 우주로 보내는 것만 가능할 뿐 지구로 다시 돌아오는 기술까지는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이 아닌 강아지를 스푸트니크 2호에 실어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고된 훈련을 통해 선발된 우주탐사견 라이카를 실은 스푸트니크 2호는 우주의 어느 작은 행성에 불시착한다. 그러나 라이카는 이 상황이 이전까지 해오던 훈련과 같은 것이며, 그렇게 이 훈련도 어제처럼 견디기만 한다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 캐롤라인이 어제와 같이 자신을 바라봐주고 아껴줄 것이라 여기면서 마냥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이때 라이카가 불시착한 우주선 밖에 나와 발을 디딘 곳엔 왕자, 장미, 바오밥 나무들이 있다. 맞다, 우리가 아는 B612에 사는 그 익숙한 '어린 왕자'.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을 '존재'라고 부른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정확히 이 상황을 묘사해보자면, 왕자와 장미는 라이카가 자신들이 사는 이 행성에 불시착할 것이라는 걸 알고 라이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왕자는 인간들이 지구 행성에 오랫동안 가해왔던 지배와 폭력들을 계속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어느덧 인간 나이로 20대 후반 청년의 모습이 되었으나, 소위 인간에 대해 겪을 만큼 겪었기에 이제는 인간을 경멸하고 환멸한다. 그래서 왕자는 지구를 소행성에 충돌하게 해서 모든 생명체가 지구에서 사라지도록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라이카도 이해하고 동참하게 하기 위해 라이카가 그 행성에 적응하도록 만든다.
자,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굵직한 골자다. 나는 극에서 장미에 대한 설정이 여러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너무 얄밉지는 않은 수준에서 자기애를 외치는 존재이지만, 그러한 성격에도 나름 사연은 있다. 사실은 소설에서 어린 왕자가 떠난 후 혼자 기다리는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인간들이 쓴 책을 읽었던 것이고, 그에 따라 그 존재가 내린 결론이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장미는 인간의 성찰이 담긴 책에서 존재로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장미가 마음에 들었떤 철학자는 사르트르였나보다. 사실 뮤지컬에서는 여러 철학자들의 유명한 문장들을 꽤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방식으로 해당 뮤지컬이 보여주고자 하는 여러 메세지 중의 한 부분들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변형한 '나는 아름답다, 고로 존재한다'라거나, <아름다워>라는 뮤지컬 넘버 속 등장하는, 사르트르가 언급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장의 나열이라거나.
다음은 장미가 라이카에게 보여주는, 존재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담은 곡 가사의 일부이다.
나는 아름답다, 고로 존재한다.
사르트르라는 인간은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존재한다는 건 자신이 자신을 선택하는 거라고"
타인은 지옥, 존재는 혼자.
나는 오직 나를 위해 아름다워.
내가 택한 나의 본질 아름다워,
여기 이곳에서 다시 태어난다.
처음에는 누구나 의미 없는 것,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의무는 없어, 책임도 없어, 쓸데없는 관계 따윈 잊어버려
너는 이제 누구보다 자유로워
다시 태어난다. 새로 존재한다.
(아름다워 넘버 中)
그런데, 존재에 대해서 말한 사람은 비단 사르트르뿐만이 아니다. 극에서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전개를 의도적으로 피하고자 '존재'를 다룬다. 그런데 이 극에서 결국 비인간 존재의 물음을 통해 다뤄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물음'은 인간 존재자의 특유한 방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물음은 오히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논의에 더 가깝다. 여기서 그들의 이야기(둘을 하나로 묶는 것이 무리가 있긴 하지만)는 한 마디로 인간 존재의 특유한 존재 방식인 ''실존'을 분석하고 다루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본질과 실존은 사실, 존재자에 대한 일종의 '짝' 개념이다. 전자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래적 특성을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그 존재자가 현재에 나타나는 실제의 모습을 의미한다. 또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한 사르트르는 선택하고 결단을 내릴 때 나의 '본질'을 택하겠다고는 말하진 않았다. 오히려 사르트르의 맥락에 따르면, "내가 택한 나의 실존 아름다워"라고 장미가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장미의 성격을 빠르게 표현해내야 하는 연출적 특성상 유명한 철학자의 대표적인 문장을 가져옴으로써 그 존재의 모습을 재빨리 선명하게 표현해낼 수밖에 없겠지만, 때문에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논의들이 다소 납작하게 다뤄진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유명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가져와서 오해되고 곡해되게 만든다고 하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유명한 문구가 극 속에 등장하기 위해 다뤄지고 있는 전반적인 맥락의 논의들이 단편적으로만 다뤄지는 것에 대한 자그마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클 뿐이다. 그럼에도 이 뮤지컬은 접목되기 쉽지 않은 어려운 철학적인 소재를 극에 녹여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두고 남을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