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일을 한다. 내가 하는 이 일이 세상에 쥐꼬리만큼이나마 영향을 끼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을 한다. 정해진 루틴을 따라 출퇴근한다. 이제는 잠에 취한 몸이 먼저 버스 시간을 기억하고, 곧 오르게 될 버스가 따르는 길은 몇 년째 정해져 있다. 서울 사는 직장인들의 사기를 꺾는 데 1등 공신이 만원 지하철이라던데, 그래도 출퇴근 길을 오가는 이 405번 버스가 고맙다. 맨 뒷자리 창가에 편히 앉아, 그래도 책 몇 자 나마 읽을 수 있는 것은 몇 안 되는 보람이다. 매일 아침 남산 허리를 꿰며, 해방촌 높은 언덕에서 굽어보는 아침 길이 적당히 고맙다. 그리고 버스를 내린 다음부터 펼쳐질 오늘 하루는 심심하다.
나는 일을 한다. 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한다. 돈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차라리 일을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쯤이야 머리로는 이해한다. 할 일이 없고, 갈 곳이 없다는 건 인간을 미치게 하니까. 요즈음 회사는 카드키 대신 안면 인식으로 보안 해제를 하는데, 내 얼굴 찍힐 곳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가야만 하고, 또 갈 수 있는 곳이 있음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다만, 그를 아무리 깊이 이해하여도 뼛속까지 속일 수는 없는 법이라. 하여 나는 계속해서 감사할 것들을 생각한다, 저항하기 위해, 지루함에 먹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다지 새로운 일이 없는 일상, 회사와 체육관을 순환하는 어제도, 오늘도 나는 같은 길을 걷는다. 아주 느리게 날씨가 변해가는 것만이 느껴지는 익숙한 길. 나는 내 지루함과 싸우고, 또는 저항하거나 심지어 타파하려 들고, 그것은 웬만큼은 잘 되어가지는 않는 일이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에, 사유만으로는 더뎌낼 수 있을 뿐 극복해낼 수 있는 게 아닌 까닭이다. 꼭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맡아보아야만 아는, 몸이란 참으로 정직한 기관이라. 그래서 ‘몸’에게는 가끔씩 연극을 들려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런 사소한 전처로 내가 빈 주말, 부러 씻고 집을 나서 연극 워크맨 객석에까지 오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다. 일하지 않는 자들에의 저주라니. 테마가 꼭 일치하지 않겠는가.
종종 드나드는 대학로에는 젊은, 정확히는 어린 친구들이 많이 보인다. 삼삼오오 모여 걸으며, 무진장 웃음을 생산하는 얼굴들을 보면 언제나 조금 멈추게 된다. 과거를 들춰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웃음의 빈도란 심장의 빠르기에 맞닿아 있지 않은가 종종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내 심장은 느리게 뛰기 시작했고, 언제나 좋음과 나쁨은 한 몸으로 온다. 평온함과 지루함은 같은 얼굴의 두 표정이다.
*
연극 워크맨의 캐치프레이즈는 ‘걷지 않고 일하지 않아 발생한 비극에 관하여’이다. 2060년의 서울은 주 3일 3시간 노동의 시대, 거기다가 정신없는 이상기후로 초 국지성 소나기와 5월의 눈꽃이 만발하는 시대란다. 기후위기는 이미 실시간, 현재 진행형이고 조만간 AGI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복합다관절 휴머노이드가 테스트 베드를 마친 다음, 양산에 돌입하게 되는 것 또한 막을 수 없는 미래일 것이다. 딱히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값싼 노동력과 휴머노이드 자본가가 세상의 노동 자본을 다 삼키면, 자본주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공상도 가끔 해오곤 했지만, 이 연극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니 패스.
그 미래에는 더욱 보편화된 정신병과 그것을 실시간으로 진단할 수 있는 보조 AI가 보급되어 있다. 2060년, 커피가 한 잔에 5만 원이라는데 AI 구독료가 그 얼마일지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만연해져 있는 정신병. 먼 미래로 갈 것 없이 과거보다 정신병 발병률이 높아진 지금을 보노라면, 편리와 편안이란 정신 장애에 직결되는 주요 팩터가 아니인가 자주 생각한다. 언제나 좋음과 나쁨은 한 몸으로 오는 법이지. 서글픈 것은 그걸 아주 물리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 선을 끊고, 맨날 걸어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그리고 아마 모든 우리는 저항하고, 다만 할 수 있는 일이란 늦춰내는 일뿐이다.
206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정신병을 앓고 있다. 성인 ADHD, 분노 조절 장애, 만성 불면증, 경계자 신드롬, 노인 우울증, 중증 유전성 우울증과 공황장애, 그리고 습관성 알콜 의존 장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친숙한 정신 질환들, 이미 이것들이 우리와 그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렇다면 나아가 얼마나 더 많이 또 가까이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겠는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주 3일, 일 평균 3시간의 노동은 지금의 그것에 비하자면 한없이 적다. 극의 대전제는 이 ‘부족한 육체 활동’이 정신 질환을 창궐시키고 있다 말하는 듯하고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그 육체 활동의 빈자리를 워크맨 캠페인으로 메꾸며, 각자 정신질환에 대항해 나가려는 것이 극의 주요 동인이자 초기 구성이다. 이 또한 완전 새로운 것은 아닌 듯싶다. 지금도 걷기 캠페인은 심심찮게 보이며, 특히 우울증과 자살 관련 걷기 캠페인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엄연 존재한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사이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워크맨’이라는 것은 미래 현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 정신질환 캠패인이자, AI 의료 서비스이다. AI는 사용자의 대화 디스크립션을 읽고 해석해, 종합 정신 건강 지수와 예방법을 알려준다. 예방법은 다양한 방식의 ‘걷기 운동’이다. “우울증이시네요, 4시간 슬로우 워킹을 추천드립니다. 불면증이시네요, 7시간의 인터벌 워킹을 추천드립니다.” 대략 이런 식.
다들 아시다시피, 정신 질환에는 좀체 완치가 없는 법이다. 그와 관련된 각 다른 캠페인들이란 1차적으로는 그 이상의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이고, 실질적 재활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런 처지에 AI 어시스턴스는 이 기나긴 시간 사이, 인력의 한계와 공백을 채우는 효과적인 도우미이다. 사람들은 AI와 휴머노이드의 도움을 받아, 명랑함을 잃지 않으려 저항한다.
더 적게 일하고, 더 적게 걸을 수 있는 시대, 누군가는 그러한 것을 가능케 한 시대의 편의에 따라 집 안만을 전전하기도 한다. 사회성은 뒤따라 적어지고, 소심해진 인물은 사회 교류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참작 가능한 군상, 저 모습은 지금 시대의 심화다. 인물의 캐릭터성은 매우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다. 그건 어쩌면 인물들이 관객과의 동시대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결말은 아쉬웠다. 극의 절정부 사건은 유전성 중증 우울증을 앓던 주인공의 투신자살 시도와 그 실패인데, 연극이 딱 거기서 멈춰버린다. 그녀의 서사에는 이렇다 할 인물 간 갈등이 없었다. 아버지와의 갈등, 직장 동료와의 갈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행동에 따른 등장인물들의 당연한 현실적 반응, 즉 트러블이었을뿐 극적 갈등을 형성하기에는 미약했다.
그런 그녀의 자살 시도는 인물들 간의 사건이나 갈등, 즉 서사의 개진에 따라 순차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초기 설정을 답습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비가 오는 날에 자살 충동을 느끼던 어머니, 어머니의 자살, 그런 어머니를 닮은 그녀. 극의 막바지, 그녀는 비가 오는 날 결국 바다로 투신했고, 안드로이드에 의해 구조된 그녀는 물을 뿜으며 소생하고, 엔딩. 안타깝게도 이 사건이 단순 해프닝, 즉 ‘우발적 사건’이 되어버렸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여러 인물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묘사해낸 시대적 배경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계자 신드롬, 노인 우울증, 만성 불면증, 알코올 홀릭 등. 개별 군상에 대한 묘사는 충분했고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냈지만, 그 인물들의 설정은 극의 시대 배경을 그려내는 데 활용되었을 뿐, 그 이상의 사건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더구나 절정부를 담당하던 사건조차 인물의 초기 설정이었던 우울증의 발현이었기 때문에, ‘워크맨’이라는 메인 소재 또한 주제 의식에 적극 활용되지 못한다. 결말에 대한 개인적인 후기를 요약하자면, ‘먼 미래의 사람들은 걷지 않아 우울해했다, 거기 AI 어드바이저도 있었고, 사람들이 걸으려 하긴 했다. 끝’이랄까. 조금 허망했다.
극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얼핏 참작 가능하지만, 내재적 해석만으로는 주제 의식 도출이 어렵다. 워크맨이라는 앱을 개발해 사람들을 독려하던 개발자도 알콜 의존증을 앓고 있었고, 사람들은 어드바이저의 조언을 따라 걸으려고 노력하지만 좀체 개선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다. ‘걷고 일하지 않아 발생한 비극’, 그것을 드러낼 갈등의 씨앗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등장한 절정부 사건에 의해 이 모든 것은 베일에 싸여버린 것이다.
왜냐면 그녀는 소재로써도 워크맨을 적극 활용하지 않았을뿐더러, 그녀의 투신은 워크맨의 의도와는 하등 무관한 것, 즉 걷거나 일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선천적인 유전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워크맨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능했고, 어떤 결말과 주제 의식을 도출하려 했는지를 내재적으로는 도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앞선 캐치프레이즈에 대한 극의 주장, 이를테면 “그럼에도 걷고 저항하고 노력해야만 하는가, 혹은 어떻게 해도 인류가 시대의 편리와 그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인가”와 같은 문제도 논의되지 않는다.
*
‘걷고, 일하라.’ 참 소박한 말이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 그리고 점차 줄어가는 것. 나는 걷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본사 근무를 하기 전까지는, 아침저녁으로 왕복 1시간을 꼬박 걸어댔거니와 물류 현장 특성상 뛰어다니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윤택함은커녕 삶의 여유도 없는 그때에 허나, 나는 역설적으로 보다 활기차고 강했다. 10시에 귀가해 고꾸라듯 잠에 들자마자, 5시에 기상해 집을 나서는 삶의 반복에도 나는 강했다. 아니 그건 강한 게 아니라 무언가, 그러니까 예컨대는 지루함과 같은, 정신의 방해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것이 사유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언젠가부터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단 한 순간 사유를 멈춘 적도, 내 육신에 대한 저항을 멈춘 적도 없는 까닭에.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정신의 영역이 아니라 몸의 영역에서 비롯되는 감각이다. 사유하지 않아도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힘, 이미 이 안에 들어 차있는 무언가. 그건 피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걷고 뛰며, 점차 달아오르는 피. 데워진 몸을 굴려 앞으로 박차고 나가면, 언제나 정신은 쫄래쫄래 뒤따라오게 마련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출퇴근 길은 비약적으로 짧아졌고, 사무실에서도 온종일 편하게 앉아서 일한다. 요즈음 나를 감도는 지루함은 이 달콤한 편리에 뒤따르는 필연적인 그림자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넉넉함이었는지, 여유로움이었는지, 강인함이었는지 다 알 수 없는 그때 그 상태를 이따금 그리워한다. 새벽 한기와 좀체 밝아오지 않는 하늘과 텅 빈 버스를 바라보며, 졸린 눈을 비비며 나는 웃고 있었다.
걷지 않고 일하지 않는 미래인들의 일상, 그것에 관한 작가의 상상력이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극은 시대의 초입에서 마친다. 그래도 덕분에 걷고 달리고 활기 넘치던 예전이 떠올랐으니,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남는 장사인 셈이다. 자 일어나, 일해야지. 눈뜨면 거기 틀림없이 있을, 내일의 405번 버스와 해방촌 언덕길로 가야지. 기왕이면 다행스러운 걸음으로 가야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