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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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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오케스트라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여성이 명문 오케스트라에 들어가 악기를 연주하고 지휘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 오린 오브라이언은 뉴욕 필하모닉의 첫 여성 정규 단원으로 입단하게 된다. <온리 걸 인 더 오케스트라>는 주연으로 돋보이기보다 오케스트라를 든든하게 지탱하는 조연을 자처한 더블베이시스트 오린 오브라이언의 삶과 음악 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이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단편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그녀가 음악계의 차별을 이겨내고 전설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35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 담백하게 담아냈다.

 

 

 

편견과 차별 속에서 써 내려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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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케스트라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 필하모닉은 창단 180년 만에 여성 연주자가 남성 연주자 수를 넘어섰다. 지금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단에서 여성 연주자와 지휘자를 보는 게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브라이언이 뉴욕 필하모닉에 정식 단원으로 입단하던 1966년엔 그녀의 존재 자체가 큰 뉴스거리였다. 당시 뉴욕 필하모닉이 입주한 링컨 센터에는 여성 탈의실이 없어 그녀는 매번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지 않는 오브라이언이 겪어야 했던 다른 고초에 비교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브라이언은 뉴욕 필하모닉의 홍보용 사진 모델이 되어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뉴스 기사에 그의 이야기가 대서특필되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기사에는 '본인이 연주하는 더블베이스처럼 몸매가 굴곡진 오브라이언 양'과 같이 그녀의 신체를 불필요하게 묘사한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었다.


'투어 중에 다른 남자 연주자들은 그녀의 가방을 들어 주겠다고 몸을 던지거나 버스 좌석을 맡아주며 만회했다.'나 '그 여자가 매력적이라면 같이 공연할 수 없다. 매력적이지 않다면 같이 공연하고 싶지 않다.' 등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무례하고 차별적인 세상의 시선과 언행을 혼자 묵묵히 견뎌야 했다.


세상은 “여자의 60세 때 기량은 남자의 60세 때 기량과 다르다.”라고 크게 떠들었지만, 오브라이언은 이를 비웃듯 무려 55년간 뉴욕 필하모닉의 더블베이시스트로 활동했다. 어느덧 86세가 되어 은퇴를 앞둔 그녀는 중년의 여성 연주자 후배와 함께 이 기사를 다시 읽으며 코웃음을 친다. “내 가방을 들어준 남성 연주가들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 자기네들 악기 챙기느라 바빴다고!”

 

 

 

더블베이스처럼,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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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라이언의 아버지 조지 오브라이언과 어머니 마거릿 처칠은 모두 한때 이름을 날린 할리우드 스타였다. 두 사람 모두 사람들의 관심을 즐겼고 타인의 눈에 띄길 원했지만, 정작 딸인 오브라이언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는 데 큰 불편함을 느꼈다. 특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이사를 해야 했던 가정 환경과 부모님이 이혼하는 과정에서 생긴 극적인 사건들은 어린 그녀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다. 그 과정에서 생긴 정서적 혼란과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음악 활동에 더 몰입했고, 자신의 감정을 더블베이스 연주로 표현하며 답답한 현실 속에서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맡으며 큰 사랑을 받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오지 않는 캐스팅 전화를 쓸쓸히 기다리는 한물간 배우가 되었다. 오브라이언은 낙담하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인기는 다 허상일 뿐이고, 타인의 관심과 사랑에 집착할수록 내면이 망가지기 쉽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


어쩌면 그 깨달음이 오케스트라에서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뒤로 물러서 있는 더블베이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더블베이스는 바이올린, 첼로와 같은 다른 화려한 현악기와 달리 독주곡을 찾아보기 힘들다. 주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받쳐주거나 다른 악기와의 화음을 이루는 데 집중하는 편이라 혼자 돋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감마저 희미한 것은 아니다. 묵직한 저음으로 오케스트라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며 오케스트라의 뼈대를 책임진다. 이런 더블베이스는 꼭 명예와 업적을 애써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오브라이언의 삶과 신기할 만큼 닮아있다.

 

 

 

성실함에서 오는 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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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라이언은 인생을 충만하게 즐기는 자신만의 이론을 소개했다. 그건 바로 ‘보조 연주자 역할을 마다하지 말 것.’ 누구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주연을 꿈꾸지만, 그는 주연을 빛나게 만들어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을 완성하는 조연이 되려고 평생을 애써왔다. 모든 이의 박수갈채와 화려한 조명을 독차지하는 대신, 기꺼이 그 옆의 어둠으로 조용히 물러나길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성공과 명예를 따르기보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더 잘 해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뉴욕 필하모닉 최초 여성 정식 단원’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이 따라왔다. 타인의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내 일에 자부심을 지니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해내는 이가 얻게 되는 후광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브라이언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인기를 얻는 데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 보였다. 좋아하는 일을 곡진히 해내며 함께 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화음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 것.

 

존재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의 기적이자 꿈인 그녀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빛을 내며, 차별과 편견이라는 어둠을 지우고 새로운 희망을 선보였다.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돋보이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오히려 자신만의 선명한 아우라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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