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심상치 않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을 강타했다.
그 파급력은 실로 엄청났다. 9시 뉴스가 주목하고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2013년, <진격의 거인>은 거인과 맞서 싸우는 인류라는 짧고 강렬한 줄거리로 소년 만화 역사의 획기적인 한 획을 그었다. ‘진격의 ○○’는 지금까지 사용되는 관용적인 수식어가 되었다.
그 기세가 꺾인 것은 작가가 SNS에 우익적인 발언을 게시한 것이 드러난 이후였다. 궁지에 몰린 인류는 일본, 벽 밖에서 쳐들어오는 거인은 한국을 비롯한 열강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작가의 우익적 발언은 <진격의 거인>의 인기가 한국에서 소멸하기에 충분한 듯싶었다. 게다가 속편의 제작이 예상보다 길어지며, 한국에서 <진격의 거인>의 위상은 한때 잠깐 인기가 있었던 우익 만화쯤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2025년. <진격의 거인: 더 라스트 어택>이 한국 박스오피스 예매율 1위를 달성했다.
진격의 거인은 어떻게 다시 한 번 한국에서 영광을 되찾은 것일까.
사실 미지의 괴생명체와 인류의 대결은 결코 낯선 주제가 아니다. 장르가 소년 만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진격의 거인이 둔 한 수는 ‘첫 화의 임팩트’였다.
페이지 전면에 가득한 ‘초대형 거인’의 얼굴은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다. 대부분의 소년 만화에서 초반부는 인물과 세계관 소개로 큼직한 전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진격의 거인은 1화부터 급박한 전개가 시작되며 독자들에게 거인의 공포를 각인시켰다.
다만 진격의 거인이 단순히 거인과 맞서 싸우는 인류를 다루는 만화였다면 연재 10주년이 넘은 지금 한국에서 예매율 1위를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일반적인 소년 만화의 작법을 따라가는 듯하다가도 한 끗씩 어긋난다. 이를테면 캐릭터를 기용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진격의 거인의 무대는 생각보다 방대하다. 세계관이 비밀이 풀리며 인류는 더 이상 거인과 대적하지 않는다. 벽 안의 주인공들이 맞서야 하는 것은 그들을 제외한 전 세계였다. 거인과의 전투 끝에 이제는 인간을 대적해야 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사상과 이념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다. 꿈꿀 수 없는 천국에 남을 것인가, 꿈꿀 수 있는 지옥에 남을 것인가. 온 세상을 짓밟을 것인가, 공존을 위해 대화할 것인가.
이처럼 지극히 판타지스러운 세계관이지만, 그 속의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납득 가능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진격의 거인만의 차별점이다.
대개 이능력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스토리의 비중 상 중요하지 않은 적을 죽이는 행위는 잡종 몬스터를 해치우듯 묘사되어, 인물에게 별다른 죄책감이나 고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의 능력을 부각하기 위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장면이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만화보다 죽음의 최전방에서 싸우는 진격의 거인 속 등장인물은 오히려 같은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자책한다. 감정 표현의 묘사도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라기보단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비춘다.
무엇보다 작가의 ‘떡밥 회수’ 능력은 10년간의 연재를 이끈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1화와 마지막 화가 수미상관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오랫동안 이 작품을 사랑해 온 독자들에게 감동과 전율을 선사했다. 진격의 거인이 단지 반짝 떴다 사라진 작품이 아니라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할 수 있던 것도 먼 미래까지 내다본 치밀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격의 거인>의 최종장을 다룬 이번 극장판은 메가박스에서 단독 상영되고 있다. 특히 4D 특별석은 모든 회차가 매진되고 있다. ‘입체기동장치관’, ‘104기관’, ‘조사병단관’ 등 애니메이션 설정에 입각한 프로모션도 매진 행렬에 한몫했다. 스크린을 압도하는 거대한 거인과 입체기동장치를 이용한 박진감 있는 전투씬은 4D 상영의 이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또 일본과 동일한 특전을 배포하여 n차 관람객 역시 늘어날 전망이다. 극장가의 오랜 침체에서 진격의 거인은 영화관에서 보기에 충분한 쾌감을 선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격의 거인을 옛날에 잠깐 인기가 있었던 만화로 기억하던 이들에게 다시금 부활한 이 열풍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2기가 공개되었을 당시, 1기를 뛰어넘는 뛰어난 작화와 연출은 한국에서도 다시 한 번 ‘진격’의 붐을 일으켰다. 4년간의 공백 동안 작가의 우익 발언이 루머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그에 대한 사실 관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게다가 우익 논란뿐만 아니라 자살 돌격을 미화했다는 비판과 나치-유대인 관계에서 모티브를 얻은 마레-엘디아의 설정 또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작품이 최종장에 가까워질수록, 진격의 거인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해졌다. 전쟁과 학살은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혐오와 증오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인간을 믿고 미래를 이야기할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 대서사시는 마침내 막을 내린다.
<진격의 거인: 더 라스트 어택> 엔딩 크래딧
이제, 자유를 향한 싸움도 끝이 난다. 10년간의 여정이 이로써 마무리된다. 가능하다면 꼭 영화관에서, 그 긴 시간들의 집약과 대서사시의 종막을 함께하길 바란다.
필자는 13년부터 진격의 거인을 지켜본 한 독자로서, '진격'이란 단어에 짙게 베어든 이 만화를 쉽게 잊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