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1964년 작 <만선>의 재탄생, 왜 지금 다시?
1964년에 발표된 천승세의 희곡 <만선>은 산업화가 막 시작되던 1960년대 한국 어촌을 무대로, 전통적인 어업 방식과 자본의 논리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비극적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바다는 이 작품에서 먹고사는 터전이자, 언제든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곰치’를 비롯한 어부들은 ‘만선’이라는 희망을 좇아 목숨을 걸고 출항하지만, ‘있는 사람들’의 수탈과 대자연의 거친 파도 속에서 번번이 좌절을 맞이한다. 이는 당시 어촌이 처해 있던 궁핍함과 사회적 모순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어 한국 근대희곡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혀 왔다.¹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2025년 현재 <만선>이 지금의 무대 위에서 다시금 관객과 만나게 되었다.² 하지만 오늘날 공연되는 <만선>은 단순히 과거의 작품을 복원하는 복원극이 아니라 새 시대의 시각과 연출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과감한 각색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관객들은 원작에 등장하던 가부장적 부부 관계가 한층 입체적으로 변주된 모습을 보게 되고, 젊은 세대가 운명에 저항하는 이야기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 무대를 마주하게 된다.³
또한 사실주의적 무대장치에 수십 차례 번쩍이는 번개를 표현한 조명의 전환, 5톤의 물을 쏟아붓는 과감한 표현주의적 요소가 결합되면서, 초연 당시와는 전혀 다른 감각적 체험이 가능해진다.⁴
이처럼 2025년 판 <만선>은 원작이 지닌 사실주의적 힘을 놓치지 않되, 동시대적 고민과 연극적 실험성을 더욱 첨가함으로써 과거의 희곡을 ‘지금, 여기’의 목소리로 재탄생시킨다. 이는 ‘고전의 무대화’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서로 충돌하고 융합해 새로운 의미를 빚어내는 창조적인 작업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오래된 희곡이 오늘날에도 생생한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파급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여전히 유효한 시대정신과 인간의 보편적 갈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¹ 이수진. (2021.08.26.).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정수 ‘만선’...무대에서 살아난 교과서 속 작품」. 인터뷰 365.
² 국립극단. (n.d.). <만선>. 국립극단.
³ 김민. (2025.03.12.). 「다시 닻 올리는 ‘만선’, 올가미 같은 현실은 여전한데…」. 동아일보.
⁴ 국립극단. (2021.09.16.). 「4DX급 리얼리티 '만선' 무대 셋업 #타임랩스 l 온라인전시 ‘만선’」.
연합뉴스TV. (2021.09.04.). 「포기할 수 없는 '만선'의 꿈…사실주의 명작 무대에」.
2. 자연과 인간의 관계. 바다는 풍요인가 파멸인가?
원작 <만선>에서 바다는 언제든 어부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도, 순식간에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이중적 존재로 그려진다. ‘곰치’와 동료들은 바다에 배를 띄울 때마다 “배 노는 것이 첫눈에 만선이여!”¹라는 말처럼 희망에 부푼다. 그러나 비극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불현듯 불어닥치는 폭풍우에 배가 전복되고, 어렵게 잡아 올린 고기는 갑자기 뱃삯을 갚으라는 선주의 고함에 고스란히 빚을 갚는데 빼앗기고 만다. 관객은 이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바다가 지닌 모순된 얼굴을 체감하게 된다.
2025년 리메이크판 역시 이 모순적 측면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무대 미술과 연출에 공을 들였다. 기울어진 배의 갑판을 떠올리게 하는 경사진 나무판자 무대와 평상도 없는 좁은 마루에 기울어진 양철 지붕 집에 폭풍우를 연출하는 물줄기와 회오리바람이라는 장치가 덧붙어, 관객이 실제로 파도를 맞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닥이 기울어진 갑판 형태로 설계되어, 배우들이 걸을 때마다 넘어질 듯 휘청이는 모습은 배와 몸을 동여매고 파도와 대결하는 선원의 그것처럼 바다의 무서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거센 물을 뿌리는 장치와 음향 효과는 파도 소리와 물살을 생생히 구현해 무대가 곧 바다 그 자체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 순간순간 천장에서 뿌려지는 빗물과 비가 그친 뒤에도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 그리고 번쩍이는 조명 효과는 바다는 언제든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근본적이고도 광포한 두려움을 깨닫게 하며 시각적, 청각적으로 구현해 낸다.
극 중 ‘곰치’가 보여주는 태도는 이러한 연출과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아들을 이미 셋이나 ‘제물’로 바친 상황임에도 “이 곰치가 그물을 놓는 날에는 차라리 배를 갈르고 말 것이여.”²라는 말처럼 바다와 배, 그리고 자신을 동일시 하며 바다에 나아가길 포기하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보면 ‘곰치’의 이런 태도는 고집스럽고 답답하며, 가족을 죽음으로 내모는 미치광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한, 만선이라는 목표에 눈이 멀어 합리적인 판단을 잃은 채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는 바다가 ‘자신이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이기에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나 숙명적 싸움으로도 읽을 수 있다. 바다는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동시에 가족을 지키고 먹여 살릴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곰치’의 그치지 않는 출항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와 같은 인간의 지독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바다와 인간의 대립 구도는 <만선>이 지닌 원형적 갈등이자, 극의 비극성이 출발하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 축이라고 볼 수 있다. 2025년 판에서는 무대와 배우의 움직임을 통해 그 갈등을 더욱 체감할 수 있도록 연출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바다가 가진 양면성과 그것에 맞서는 인간의 숙명을 더욱 직접적으로 와닿게 한다. ‘곰치’가 물살에 휘말려 만선이던 고기를 다 놓치고 배가 산산조각이 나 나무판자 하나에 실려 폭풍우를 견뎌내면서도 다시 배를 띄우겠다며 돌진하는 장면은 고전적 서사를 넘어 오늘날에도 유효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는 보편적 질문을 다시금 환기한다.
¹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2025). 2025 만선 프로그램 북 (p. 25). 서울: 국립극단.
² 위의 책, p. 24.
3. 자본계급의 수탈. 비인간적인, 그러나 인간적인.
1960년대 한국 어촌은 자본을 쥔 선주(임제순)나 객주(범쇠) 같은 이들이 어민들에게 고리대를 놓고, 엄청난 이자를 챙기는 구조가 공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원양어업을 위한 대형 선박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가난한 어민들은 여전히 낡고 작은 배와 손으로 치는 그물에 의존해야 했다. 문제는 이렇게 힘겹게 이룬 만선의 기쁨도 대부분이 빚을 갚고 고리대 이자로 선주와 객주에게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곰치’와 아들 ‘도삼’, 동네 청년 ‘연철’, ‘곰치’의 오랜 친구 ‘성삼’이 죽을힘을 다해 고기를 잡아도, 고기 판 돈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그동안 못 갚은 뱃삯’이라는 명분의 빚뿐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착취 관계에 갇힌 사람들은 바다라는 자연의 위협과 육지에서 기다리는 자본가 계급의 수탈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2025년 판 <만선>은 이러한 경제적 수탈 구조를 한층 노골적으로 부각한다. ‘임제순’은 단순히 배라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라는 신분을 넘어 빚을 못 갚으면 ‘저기 쓰러져 가는 집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몰수한다’라는 악덕 계약 이용해 어민들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을 대표한다. ‘범쇠’ 역시 빚을 대신 갚아 줄 테니 딸 ‘슬슬이’를 단돈 2만 원¹에 팔라던가 그마저도 안되니 식모나 찬모가 아니라 ‘여편네’(부인)로 들이려 한다는 속임수로 어민들을 농락하면서,² ‘곰치’가 만선으로 빚을 다 갚고 내 배를 갖겠다는 마지막 희망마저 좌절하게 만든다. 무대 위에서 이들이 행사하는 권력과 폭력은 ‘곰치’가 아무리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바다로 나간다 한들 육지에서 또 다른 ‘파도’를 맞닥뜨릴 운명이라는 아이러니를 관객들은 예감하게 된다.
이와 같은 착취 구도는 단지 1960년대의 특수한 상황으로 머무르지 않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오늘날 관객에게도 연상되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상대적 빈곤과 불평등은 심화되고 소수 기득권이 다수 약자를 지배하는 경제구조가 여전히 유지되거나 더 악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곰치'가 끊임없이 되뇌는 “이겨야 한다”라는 대사는 그저 폭풍우를 이겨내고 대어를 낚아 올리겠다는 희망찬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선주나 객주 같은 ‘가진 사람들’의 횡포를 이겨내고 더 이상 ‘없는 사람’의 서러움을 겪지 않으며 내 배를 가지고 내 몫의 물고기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사투의 표현일 것이다.
바다의 거친 파도와 육지의 수탈은 극 전체에 걸쳐 맞물리며 나타난다. 바다는 ‘곰치’ 일행에게 당장 목숨을 위협하는 절대적 자연이지만 선주와 객주가 만든 구조적 폭력 또한 이들의 삶을 옭아매는 환경이다. 결국 <만선>은 자연과 사회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어민들이 허덕이는 모습을 그려내고 ‘곰치’의 외침을 통해 관객이 불공정한 현실에 대해 함께 분노할 수 있도록 만든다.
¹ 현재 물가로 약 570만 원에서 1,140만 원 사이
² 극 중에 ‘범쇠’가 이미 그런 식으로 가난한 집의 딸을 사들여 집안에 서너 명의 여자들이 기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4. ‘곰치’와 ‘구포댁’의 재해석
2025년 판 <만선>을 연출한 심재찬은 공연 후 이어진 ‘예술가와의 대화’¹에서 “(작품이 써진) 그 당시에는 ‘곰치’가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이고 고집을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여서 그랬는지 여성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는 것을 그 당시에 미덕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중략) 하지만 지금에서 그 희곡을 읽어 본다면 대단히 패배주의적으로 읽힌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원작에서 ‘구포댁’은 연이어 자식을 바다에 잃고도 남편 ‘곰치’의 결정에 묵묵히 따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수많은 어부 가족이 그랬듯, 현실의 무게와 남편의 가부장적 태도에 억눌려 ‘한(恨)’을 품은 채 삶을 이어가는 전통적 여인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적 이미지는 2025년 리메이크판에 이르러 한층 복합적인 양상으로 변주된다.
우선 ‘구포댁’은 더 이상 남편에게 끌려다니는 수동적 희생자가 아니다.² ‘구포댁’은 4접 반이 넘는 부서를 잡아도 빚으로 떼이고 나자 ‘곰치’에게 차라리 뭍으로 가자고 설득한다. 딸 ‘슬슬이’를 넘기라고 할 때도 아예 말조차 언급하지 못 하게 한다. 그리고 남은 갓난아이마저 ‘곰치’가 열 살이 되면 그물을 매게 할 것이라고 하자 빈 배에 아기 하나만 덜렁 띄워 뭍으로 보낸다. 앞의 사례들은 원작에서도 구현된 장면들이지만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2021년과 2023년 공연을 거치며, ‘구포댁’은 뚜렷한 주체적 의지를 지닌 인물로 재해석되어 왔다. 그 가장 극적인 장면이 갓난아이를 뭍으로 보내려는 시도다. 이는 ‘도삼’을 잃은 후 넋이 나간 어미의 미친 행동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다른 가능성을 열고자 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바다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뜨림으로써 자식만은 그물의 운명이 아니라 더 나은 운명을 누리게 하고 싶다는 모정이면서 동시에 나 역시 이 굴레를 벗어나고 싶다는 ‘구포댁’의 저항으로 읽히기도 한다. 비록 최종적으로는 실패하고 더 큰 비극을 초래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가 갖는 저항적 의미가 분명히 존재한다.
‘곰치’의 고집 역시 재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예전에는 단순히 가부장적 남편, 혹은 ‘자기밖에 모르는 아집’으로만 읽혔다면 새롭게 각색된 무대에서는 ‘곰치’가 자신의 생업을 지키려는 발악으로도 조명된다. 바다는 ‘곰치’에게 무조건적인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개척하고자 하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구포댁’과 ‘곰치’의 대립은 가부장적 집안의 도식적 갈등 구조가 아니라 둘 중 어느 누구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충돌인 것이다.
가부장적 남편과 순종적 아내의 구도로 해석되었던 원작의 <만선>은 2025년 판에 이르러 훨씬 입체적인 부부간의 갈등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구포댁’이 더욱 적극적으로 딸 ‘슬슬이’와 갓난 아기를 데리고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는 점은 여전히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지점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럼에도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남해의 외딴섬이라는 환경적 제약으로 봤을 때 ‘구포댁’의 소소한 저항은 소소하지 않다.
¹ 2025년 3월 9일.
² 국립극단. (2021.09.10.). [국립극단] 연극 <만선> 예술가와의 대화. 국립극단 블로그.
5. 구세대와 신세대, ‘슬슬이’의 선택
1960년대 초연된 원작에서는 '곰치'의 자식들인 ‘도삼’과 ‘슬슬이’가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을 막연히 바라보면서도 결국 어른들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희생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중에서도 ‘슬슬이’는 ‘범쇠’에게 겁탈당한 뒤 자살하는, 이른바 ‘수동적 비극’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즉, 환경적 제약을 벗어나려는 저항이나 새로운 희망, 열망을 품을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아버지 ‘곰치’와 같은 구세대와 자본가 계층이 구축한 세계에서 도피하듯 사라지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2025년 판 <만선>은 이런 젊은 세대의 위치를 대폭 수정해, 이들이 단순히 어른 세대의 희생물로만 그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각색했다. 특히 ‘슬슬이’를 둘러싼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다. 1964년의 원작 ‘슬슬이’는 객주 ‘범쇠’에게 겁탈을 당한 후 이른바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거나 순결을 빼앗겼기에 스스로 자결을 택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또 그녀의 죽음이 서사적으로 어떤 의미나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만 소구 된다. 하지만 2025년의 ‘슬슬이’는 ‘범쇠’에게 겁탈당하지 않는다. 낫과 돌을 들고 직접 그를 내쫓는다. 그리고 아버지 ‘곰치’의 욕심에 오빠 ‘도삼’뿐만 아니라 연인이었던 ‘연철’까지 죽자 ‘슬슬이’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미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2025년의 ‘슬슬이’의 죽음은 기존처럼 ‘절망에 빠진 피해 여성’이 단지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슬슬이’의 자살이 비극적임에는 분명하나, 이를 통해 과거 세대가 만들어놓은 구질서나 운명론적 굴레를 능동적으로 거부한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이러한 강렬한 장면을 통해 자신의 몸과 존엄을 지키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가진 마지막 권리이자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권리인 자신의 인생과 목숨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몸짓이다. 돈 때문에 누구에게 팔려 가지도 않고 사랑의 대상을 스스로 결정하며 자신의 인생임에도 부모가 결정하려는 것에도 마냥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기성세대가 강요해 온 삶의 방식을 벗어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서사 전개로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과거 ‘슬슬이’의 이미지를 뒤엎는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슬슬이’가 더 이상 순응하거나 희생되는 인물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할 의지가 있는 인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 같은 각색은 특히 ‘슬슬이’를 통해 무대에서 본인의 의지를 가진 존재로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거부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인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슬슬이’의 행동을 통해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기한다. 만약 2025년의 현대적 시선에서 ‘왜 뭍으로 도망가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는 작품을 너무 단순히 보는 것일 수 있다. 오히려 ‘슬슬이’의 마지막 선택에 주목하면서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저항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6. 결론
2025년 판 <만선>은 원작이 지닌 사실주의적 뿌리에 새로운 문제의식과 연출 기법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먼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바다는 실제로 물을 사용한 폭풍우 연출과 기울어진 갑판과 같은 나무 무대를 통해 관객들에게도 직접 어촌의 짠 기운을 느끼도록 한다. ‘곰치’가 파도에 맞서 매번 출항에 집착하는 모습은 자연재해에 맞서는 인간의 강인함이 아니라 바다와의 운명적 일치감을 구체화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선주와 객주가 만들어내는 수탈 구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자본주의적 모순으로 이어져 관객에게 현시점의 사회 구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가부장적 남편과 순종적 아내 구도 역시 한층 입체화되어 ‘곰치’와 ‘구포댁’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운명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며, 단순히 가부장제 권력관계 이상의 ‘다른 두 삶의 양식’이 대립하는 장치가 된다. 특히 ‘슬슬이’와 같은 젊은 세대가 원작과 달리 주체적 거부와 결단을 내리는 모습은 결과론적으로 그 모습이 비극적이라 할지라도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곰치’, ‘구포댁’, ‘슬슬이’처럼 각자가 처한 ‘죽음으로의 위기’라는 순간에서조차 운명을 거스르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의 모습은 어떠한 질문을 남긴다. 반복되는 패배와 파국의 서사이면서도 인물이 끝까지 ‘삶의 방식’,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1960년대의 희곡이 2025년까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삶이 과연 정해진 대로 순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얼마든지/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